이제 조금씩 멈추시면 안될까요....

현재를 보는 역사 이야기: 무오사화~1498~갑자사화~1504~로부터 ~2011년
역사가 현재와 같을수는 없지만 참고가 될만한 것 들은 참 많습니다.
꼭 내가 해야 잘 한다고 생각지 마시고 남도 잘 할수 있다고 한번씩 생각해 보세요.

남인,북인, 노론,소론,


외척파,친척파,임금파,왕자파,
차세대파,현재파,적군파,아군파,
매국파,수국파,실내파,야외파,
촛불파,바람파,정치파,경제파,
현장파,책상파

일반인 들 에겐  이권다툼 같은 느낌으로 와 닫는 그런 것 도 있지요 ..
약-그룹,의-그룹,

Or 
최근에는 일반인들 한테는 피부로 와 닫지도 않고 이해 하기도 어려운 그런 것도 있지요. 

검-그룹,형-그룹,

Or
국가파,개인파,

Or 
중앙파,지방파,

Or
공천파,세력파,

힘싸움 같은거 해 봐야 다 그밥이고 결국 피보는건 후손 들 이고 득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요새는 독똑한 중생들이 하는 모습이 알-부-예-공님도 놀래실 일도 많지만 ....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덩달아 따라 다니면서 춤추는 바람에 골목까지 시끄러운데,
좀 아시는 분 들도 입을 꽉 다무신다.... 

대다수 서민들은 먹고 살기 하는데도 바쁜데,
안듣고 안볼래도 도처에서 보이고 나는 소리가 때문에 머리가 아프다.

자꾸 되니 안되니 하니까 어떤게 진짠지도 모르겠고 아무리 봐도 미련한 하수로서 둘다 맞는 말 같은데 항상 생각이 다른데 있는 양쪽 이 서로 우기니까 답도 모르겠다.
차라리 모르는게 좋겠는데 안들을수도 없고 짜증도 난다.

당연히 다아..
잘 할려고 그러시겠지요 .....

이제 해가 바뀌려 하는데 ,
이쯤 해서 좀 쉬어 가면서 정리도 좀 하시면 어떨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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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총림 통도사 축제
영축 총림 개산문화대재 를 마치면서

통도사 개산문화대제


영축총림 통도사는 올해로 자장율사가 창건한지 1365주년되는해의 기념일을 맞아 다양한 행사를 했다.
11월 15일부터 개산문화대재를 봉행하였다.


양산 통도사는 보통 천년고찰 이라고 하는데 실제로는 1365주년이다.
개산문화대제는 신라 자장율사가 영축산에 통도사를 창건한 것을  開山 했다고 하는데 이를 기념하기 위해서 매년 가을 개최되는 것으로 올해 개산일은 10월 16일(음력 9월 9일)이다.

서기646년 신라 선덕여왕 15년에  자장율사가 영축산에 금강계단을 쌓아 부처의 사리와 가사를 봉안하고 통도사의 산문을 연 날인데 음력으로는 9월 9일을 기념하여 해마다 열리고 있다.

개산문화대제는 다양한 문화행사를 하며 지역과 일반 대중 사찰이 함께 어울려 즐긴다.
 스님들이 일반인과 더불어 포장상점에서 음식도먹고 차도 마시는 자유로운 분위기이다.

이번에는 영축총림 통도사의 개산일인 7일을 전후해서 5일간 개최했으며 통도사의 개산조이신 자장스님의 개산정신을 기리는데 목적이 있으며 아울러 불자는 물론이며  일반 지역주민과 문화재로서 통도사를 사랑하는 모든 방문객을 위한 문화행사이며 체험행사였다.

행사는 개산을 알리기 위한 삼보패 이운식과 석당간 전통번달기,
10회를 맞이하는 통도사 부도헌다래 전통의식 재현행사
세계적인 뮤지컬 맘마미아 초청공연 ,
경전탁본,전통 천연염색,도자기 빚기, 물레체험,
사생대회 및 재롱잔치,
지역 합창제,
통도사 합창단 기념공연,
이주노동자 초청,
불자와 일반인및 통도사 본사 와 말사 가 함께 개산을 기념했다.

통도사 개산문화대제


화엄세계로의 여행


금강계단


사용자 삽입 이미지


구룡지

구룡지 에 쌓인 동전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자기경판

자기 8만대장경 16만장

강원

  총림이 갖춘 대 강원의 실내.

초벌도자기



적멸보궁: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어도 진신사리보다 가상적인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법당의 외부 인근에 사리탑을 봉안하거나 계단(戒壇)을 설치한다.
5대보궁:
괄호안은 진신사리봉안승려 .
국내의 적멸보궁은 영축총림-양산통도사(자장), 강원도 평창의 오대산-중대사(자장), 강원도 인제의 설악산-봉정암(자장),
강원도 영월의 사자산-법흥사(자장), 강원도 정선의 태백산-정암사.
통도사 금강계단
금강계단은 사리탑에 부속된 건물로서  예불을 드리는 장소의 건물이다.
이건물의 명칭은 4방에 있다.
주로보는 입구인 건물의 동편엔 대웅전,
그 반대편인 서쪽에는 대방광전,
옆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금강계단이 있는 북쪽에는 적멸보궁
이라고 쓰여 있다.


Dramatique essay 불교탐방.


통도사 전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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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2.16 06:1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적멸보궁: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법당을 적멸보궁이라 한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셨으므로 불단은 있어도 진신사리보다 가상적인 불상이나 후불탱화를 모시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이 법당의 외부 인근에 사리탑을 봉안하거나 계단(戒壇)을 설치한다.

  2.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2.16 06:1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통도사 금강계단
    금강계단은 사리탑에 부속된 건물로서 예불을 드리는 장소의 건물이다.
    이건물의 명칭은 4방에 있다.
    주로보는 입구인 건물의 동편엔 대웅전,
    그 반대편인 서쪽에는 대방광전,
    옆인 남쪽에는 금강계단,
    금강계단이 있는 북쪽에는 적멸보궁
    이라고 쓰여 있다.



소년병 이우근(李佑根)의 일기.

이 글은 1950년 8월 포항여중 앞 벌판에서 전사한 국군제 3사단 소속 소년병 이우근(李佑根)의 호주머니에서 나온 일기이다.
 

8월10일 목요일 쾌청.

어머니,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하나를 사에에 두고 ,10여명은 될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다리가 떨어저 나가고 팔이 떨어저 나갔습니다.

너무나 가혹한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
더욱이 같은언어와 같은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 드려야 제 마음이 가라 앉을것 같습니다.
무서운 생각이 듭니다.

지금 제 옆에서는 수많은 학우들이 죽음을 기다리는듯 적이 덤벼들것을 기다리며 뜨거운 햇빛아래 엎드려 있습니다.

적병은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겨우 71명입니다.

어머니, 어쩌면우리는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다시 또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그럼.
 

아래사진은 복사 배포 전재를 불허함.

소년병 이우근의 일기


이제 곧 2010년의 6.25가 다가올 것 이며 아직도 그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것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또 이 편지에 나오는 소년병들 중에 많은분들이 지금 살아 있으며 그분들이나 그 가족들도 정규군은 아니지만 국가로부터 적절한 혜택을 받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당시 조국은 낙동강 방어선에서 어려운 전쟁으로 버틸때 약 2만여명의 소년병이 참전하여 약 2500여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학도의용군(學徒義勇軍)전사자.
국내학도 1983명,재일학도145명,옹진학도372명,기타4500명.계:약 7,000명.
전쟁동안 우리의 도덕성과 양심은 오직 살기위한 처절한 몸부림 때문에 묻혀 인간성까지 상실한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분단된 조국은 동족을 적으로 남북이 서로 군사적인 대치를 하는가운데 아직도 해결된것은 아무것도없으며 북은 적화통일을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는데 점점 그때의 형편없는 군사력때문에 UN의 도움으로 현재에 이르기는 하지만 그때 참담했던 흔적을 부산의 임시수도 기념관에서 조금 볼수 있었으며 그 자료중에서 이우근의 일기를 발풰하여 여기 올린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사자가 나 일수도 있고, 내형제나 내 아들이나 나의 친인척이 주인공이 될수도 있었던 그런 이야기 입니다.

세계 각국은 자기를 지키기위 해서 군사력을 확보하며 적어도 자기를 스스로 방어할수 있도록 노력하며 힘을 키우길 원하는데, 일부 그릇된 생각으로 나는 그 현장에 있길 싫어하고 대신 나라를 지켜주길 바라며 나는 나라를 지키는 현장에 있지 않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애쓰는 사람들을 종종 볼때 우려스러운 마음이 든다.

임시수도 기념관을 방문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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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datadoctor.biz BlogIcon data recovery 2010.06.25 16: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안녕
    아주 슬픈 기사 전쟁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의 집을 파괴하고 모든 전쟁에서 어떤 사람은 항상 사망했다. 왜 사람 좀 작은 이익만을위한 전쟁을 원하지 이해가 안돼.
    우리와 같은 슬픈 이야기를 공유 주셔서 감사합니다.


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조선시대 교육기관은 관립학교와 사립학교로 나뉘며 관립학교는 성균관,사학 종학,향교가 있으며 사립학교로는 서원과 서당이 있다.

부산 동래는 조선시대 동래부로서 인근에서 강력하고 큰 부이며 동래부는 지금의 부산 일대로서 많은 유적이 잘 보존되고 있는지역이다.

교육기관 명륜당은 동래구에 있는 유일한 지방 국립학교이며 조정에서 파견된 교수와 훈도에게서 수학한 지방의 학생들 가운데서 우수한 많은 선비, 학자, 충신열사를 배출한 곳이다.

현재 부산지방문화재 제6호로 지정되있어 선현들의 전통을 이어가며 우리의 미풍양속의 실제 유도문화를 진작하고 지역사회 정화에도 기여하고 있는 유림의 공공적인 장소이다.

우리의 선현들이 땀흘려 공부하던 곳임으로 현재에도 유림의 예에따라 엄숙하고 바른 몸가짐으로 정신을 가다듬고 관람한다.

현재 공식적인 관리명칭은 東來鄕校 典校이다.
이곳의 공부 과목은 소학,사서,삼경,근사록,여씨향약,정속,이륜행실 이었다고 한다.

오늘 이곳에 들려서 본것을 몇장의 사진으로 남긴다.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사용자 삽입 이미지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사용자 삽입 이미지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사용자 삽입 이미지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사용자 삽입 이미지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사용자 삽입 이미지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명륜당-동래향교조선시대 지방 국립학교 명륜당(明倫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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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crebiz.tistory.com BlogIcon 오백이 2009.09.05 13:0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3때 수능치고 여행다닐때 저기 가본 기억이 있네요^ㅡ^
    한복으로도 갈아입고 뭔가를 했던기억이 가물가물..



가야사 탐방때 느낀 기분 좋은 경남 김해시의 박물관도우미


김해박물관


나는 김해의 가야사부분 역사유물을 볼려고 날을 받아 작정하고 갔다.
대충 아는 김해의 역사 유적지의 위치상으로 자동차가 더 귀찮을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인터넷 지도를 검색해서 터미널에서 제일가깝게 나와 있었던 봉화유적지를 둘러 봤다.
안내인이 없어도 둘러보고 이해하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떤사람에게 물어서 도보로 대성고분 박물관에 도착했다.
나는 역사 박물관을 둘러보는데는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으로 잘 둘러볼수 있고 무었이 잘되어 있고 무었이 형식적인 치장으로 생색내기 유물전 인지는 잘 안다.

경남과 부산에 산재한 가야사 유물은 거의 대동소이 하나 약간식 특색은 있다.
그래도 김해 유적의 분량은 지금까지 모두 수량이나 질에서 만만찮다.

역사 박물관은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나,문화유물이나,또는 왜곡될수도 있는 귀중한 역사 바로알기를 위해서 국민누구나 접근이 쉽고 제한 하는 것 들이 없을때 그 효과가 극대화 되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리라고 항상 생각하고 어떤때는 아무 힘없는 안내인에게 나무라기 까지했었는데,..

김해는 발전된 현대 박물관의 매너를 안내인들의 태도에서 느낄수 있었다.
관람객이 들어오든 말든 하는 곳도 있는데 여기서는 벌떡일어나서(안일어 나고 멀끄미처다봐도 나쁜것은 아님) 무었을 안내하면 되겠는가를 물으면서 보여주는 친절한 행동과 말씨에서 첨부터 기분이 좋다.

그 사람들이 공무원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내가 말 할려고 하는것은 김해를 이야기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김해 가야사 유물을 다 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초~중년 아주머니 직원의 친절한 안내와 손수 메모를 해주는 수고를 함으로서 그날(지난주)가야사 유물을 시간적으로 시행착오 없이 잘 둘러 봤으며 오늘 이글을 쓴다.
그중에서 산꼭대기 부분은 다음 계획때 가기로 하고 그날은 보류 했었다.

아래는 내가 가는 방향에서 적절한 순서를 쓴 그분의 메모지 사진이다.물론 그분은 이 메모지 이외에도 많은 말을 내게 해 줬다.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물론 이 이외에도 박물관 입장료 해봐야 부산의 500원 받는것은 상징적인 의미이지 입장료가 비싸다곤 생각지 않는다.

김해는 그냥 Free 라고 적혀있다.
이 작은 돈 도 안받는다고 입구에 적혀있는것은 그만큼 리미트가 하나더 없어 진것 임으로 기분좋다.
줄서고 표사고 입장권 체킹하는 제한을 없앴다는 의미로 본다.
작년에 답사했던 어느 박물관은  몇천원을 받는곳도 있었고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곳 도 아직 있다.

카메라 성능이 좋기 때문에 후래쉬 없이도 얼마든지 찍을수 있는 우리 역사 유물을 제발로 공부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공책에 그림으로 그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사진은 찍지 말라고 하는 곳도 여기 김해 말고는 아직은 있었다.

구태 행정 편의주의에서 완전히 탈바꿈한 선진 김해시를 잠간동안 부러워 했다.
내가 그날 달랑 메모지 하나 받고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후 김해의 많은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만나는 모든 종사자들의 웃음이 만면한 친절과 아무 관계가 없는 능 주변의 어느 통장(뒤에안사실)님까지도 멀 하나 더 말해주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을 볼때 자기고장을 자랑하는데 애쓰는 모습 으로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스마일 김해 바이러스가 퍼젓는진 몰라도 마지막 길을 물은 롯데캐슬 아래의 어느 카센타 종업원 까지도 길가에 나와서 손짖까지 하면서 안내 하여 주었다.

지자체의 병페도 많다.
그러나 오늘 김해를 본 후에 지자체가 독창적으로 이만큼 외지 인에게 좋게 보일수도 있고 거국적 효과로 어떤 사안이 처리 될 수도 있구나 하고 오늘날 까지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부끄러워 한다.

김해 가야사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일본과 맞물려 있는 체인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포함된 곳이며 우리 후학들은 삼국시대 언저리에 결코 작지않은 제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가야제국에 대해서 알고자 할때에 행정이 제공할수 있는 모든 제한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여기 김해는 실천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는 사실을 말하는데 어디 중요하지 않고 더 중요한것이 있겠는가 마는 우리의 국민들이 스스로 관심가지고 역사의 현장에 까지 와서 머뭇 거리지 말게 해 줌으로서 먼 훗날 무지 때문에 "어찌 이런일이 일러나는가" 하고 후회 하지 않게 해 주는것은 그 관련 행정관서에서 부터 전 관련분들의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오늘 김해의 가야사 탑방을 하고 그 종사자 분들의 친절에 감사 드리며 이 글을 쓴다.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가야국탐방바로가기-1:
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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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여기 설명된 내용들은 김해박물관을 방문하여 그 안내문이나 책자와 김해시 자료를 토대로 삼국유사의 내용과 우리의 설화및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기술하였으며 역사 전문가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인용하지 마시길 바라니다.

김해 가락국 역사와 박물관 소장의 유물들을 보면서 가야사를 더듬어 먼저 삼국유사를 찾아 봤다.
길게 쓰여지지않은 가야건국 설화를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오가야(五伽耶) 편에 보면   아래와 같다.

가야국 구지봉


오가야(五伽耶)(아래는 직지프로젝트에서 삼국유사 해 한것입니다.)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해-끝

수로왕능


수로왕과 허 황후.
한반도 최남단 동남쪽 끝의 낙동강은 비옥하여 태초부터 이강을 젖줄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것은 당년하다.
설화에는 수로가 오기 전 까지는 지도자가 없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을마다 간(干)이라고 하는 추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귀간 등 아홉 추장이었고 이추장을 통틀어 구간(九干)이라고 했다.
추장들은 각기 자기 마을을 통솔한 정도이 었다.
기록에는 아홉 마을의 총인구가 7만 5천 명이었고 농경에 종사했다고 한다.

매년 3월 첫 뱀의 날을 계욕일이라고 하는데 이날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것으로 나온다.
 
당시 아홉 마을의 주민이 풍년을 비는 합동 제사였다.
어느 3월 아홉 마을 추장들이 제사 지낼때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불다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구지봉에 구름안개가 감싸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사적 자료로 보는 이야기는 당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과 모인 사람들이 이삼백명이었다고 하며 이들이 구지봉가까이 갔을때  "이 곳에 누가 있는가" 라는 목소리가 났었고, 모인자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있다." 고   구간들이 답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구지봉이다."
 " 잘 듣거라. 나는 황천(皇天)의 명령으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될것이다.
너희들은 산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구지가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
龜 何 龜 何  首 其 現 也  若 不 現 也  燔灼而喫也
위번역내용은 실제로 한문의 구음이나 뜻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에서  여러 사람이 땅을 구르면서 이 노래를 부르자 가락국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학술적인 언급으로는 ,
이 노래를 군주를 영접하는 노래 즉 영신군가(迎神君歌-임금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과거 사회에서 주술적,서사적, 노래와 춤이 엉킨 집단 무가(舞歌)로 보고 있다.

당시 전해지는 상황:
춤추고 노래하기 한참후에 하늘 한 가운데에서 자주빛 줄이 구지봉으로 길게 드리워졌고 붉은 보자기에 싸여 매달린 금합을 열어 금합 속의 둥근 황금 알 여섯 개를 보고 경배했다.
알은 아도간의 집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둔지 하룻만에  잘 생긴 6명의 사내 아이로 변했다 한다.

아이들은 십여 일만에 키가 9척으로 빠르게 자랏고 얼굴은 용 같고, 눈썹은 팔색을 뛰며 눈동자는 두개씩인 대인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중 금빛 알에서 나온자를 성을 김(金)이라 하고 가장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를 으뜸이란 뜻으로 수로(首露)라고 했다느데,이가 김바로 수로왕이다.

그후 구간들은 그들을 임금으로 모시면서 비로소 질서가 있는 국가로 탄생한다.
첫 번째 임금인 수로가 다스리는 나라를 대가야 또는 대가락이라 했고 6가야 중에 하나였으며 실제로 제일 강력했다고 보는데 근거는 확실치는 않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였다.

전하는 가야의 경계는 대가락을 이룬 여섯 가야국은 동으로 황산강, 서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에 이른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위에 올라 국가적인 성곽 및 왕궁등의 기본적인 규모를 갖추었다.

가야지붕은 이엉을 자르지 않은 풀로만든 지붕이었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석 자 이상 크게 하지 몯하게 했다고 하는걸 보면 잡다한 법이 많이 생긴것을 알수 있다.
이 모양은 현재 김해에 복원형태로 실물모양이 잘 만들어 저 있다.

금관성파사석탑

수로왕의 도성은 외성의 둘레가 1천5백 이며 그 내부엔 궁궐과 여러 관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등이 잘 정비 건축되었다.

야사에 보면 탈해와 수로왕의 변신술 재주 겨루기로 수로왕은 존경받는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개인대 대인의 변신술인지 전쟁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본다.

유천간은 왕명을 받고 망산도에서 바다를 관망하던중에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에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수로왕은 아유타국과 어떤방법으로든 통신을 한것으로 보인다.

아유타국 공주인 허(許) 황옥(黃玉) 은 16세의 나이로 하늘의 계시로 수로왕을 찾아 배필이 되고자 온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주는 신보, 조광 내외와 노예 등 20여 명을대동하고 왔다.
현재 까지도 인도에서 가야와 교류한 흔적이 기록으로 나온것은 없지만 분명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명이 허 황후이다.


이후 수로왕은 157세에 생을마쳤으며 구지봉 동쪽에 장사 지냈고 허 왕후가 처음 와서 내린 나루터가 있는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며  비단 치마를 예물로 주기위해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며, 허황후가 붉은 돛대를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허황후가 올때 가져온 붉은기운나는 돌탑을 볼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것이 불교 즉 남방불교와 연관있을것으로 생각되지만 삼국유사에서 불교에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기록에도 허황후가 불교적 의식을 한 기록이 없는것은 그 탑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렵다.

삼국유사 탑상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는 파사석탑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금관성 호계사에 있었던 파사석탑은 이읍성이 금관국일때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 24년 戊申: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고 한다.
공주가 부모의 명으로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하려 할때 水神이  노여움을 일으켜 바다가 거칠어저서 되돌아가니, 부왕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그대로 한바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할수 있었다한다.
탑은 사면이 5층으로  조각은 기묘하고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며 언듯 봐도 우리 나라 돌이 아닌것은 분명하다. 本草에 있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동혈족이다.
허씨는 허황후의 후손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모계(母系) 성(姓)씨이다.
시조 허왕후(許王后)께서는 왕자(王子) 열분을 두셨고 태자는 왕통을 이었으나
두 왕자느 이국에 출가했고 시조왕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母后)성을 계승케 했다고 한다.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후 김해에 남아있던 허씨는 김해허씨가 되었고 그 시조는 허염(許琰)이시다.
그때 하양으로 이주한 분은 하양허씨(河陽許氏)이고 그 시조는 호장(戶長)허강안(許康案)님 이라고한다.

공암양천(孔岩陽川)으로 이주한 분들은 양천허씨 이고 그 시조는 허선문(許宣文)님 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허씨들은 김해 김씨와 부계-모계로 연결된 가락의 왕손이다.
 
인천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라진 분적종(分籍宗)이며 시조는 고려 현종(顯宗)때 상서좌복야를 역임하신 이허겸(李許謙)이시다.
소성은 인천의 옛지명이다.

양천허씨 (陽川許氏)
시조는 가락국 김수로왕비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

태인허씨(泰仁許氏)
태인은 전북 정읍의 지명이며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의30세 손으로 고려태조 왕건의 부마 였으며 시산군에 봉해졌다.

하양허씨(河陽許氏)
지금의 대구옆 경북경산 하양에 있는 지명으로 시조 허강안(許康安)은수로왕비의 33세손이다.

인천허씨는 인천이씨로 보며, 인천이씨는(仁川李氏) 원래 신라시대 허씨성을 사용하던 허기(許寄)님 으로부터 출발해서 라고 합니다.




가야국탐방바로가기-1:
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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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재미로 하는 역사탐방 

김해역사 유적 벨트를 탐방한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가는것 보다는 도보로 하루를 할애 한다면 김해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봉황동을 시작으로 김해 읍성내 옹기종기 분포해 있는 유적 ,박물관,가상모형복원품,성루,등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가야국은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후학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부족 국가의 형태의 소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역사가 3국시대로 국한하는 내용을 수정한다면 그 현장에 가야 제국의 모습이뚜렸이 서있음을 알수 있다.

실제로 역사의 유물과 그 규모와 병마 제구의 질로 볼때 신라보다 우세한부분도 있고 대등한 국가라고 생각하며 찬란한 철기 문화는 신라로 일부 넘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국 말기에  신라의 외교로 고구려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개입때문에 사라진 제국 가야는 이제라도 우리는 역사에서 사국시대로 당당히 말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고령으로 부터 복천동에서 다시 김해로 오면서 역사가 쓰여진 미스테리에 휘말리고있다.

강력한 제국 가야가 왜 3국시대 언저리에서 조금 언급되고 있을뿐인가...
가야가 멸망하면서 우수한 인력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된 흔적은 많다.
또 그 기능이 신라에 전수된 흔적도 많다.
더 이상한것은  동이족의 지표인 갑골의 원류는 발해이고 그 흔적은  김해지역에서 충분히 발굴되었다.
발해거주부근에 집중된 갑골문자가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 분포 하는가에 관심이간다 .

참고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글에서는 발해연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는 최고 시기가
BC 3500~BC 3000년것이며 이는 중국 최고로 주장하는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 더 빠르다고 한다.

가야역사 베일의 뒤에는 혹시 제국의 역사가 있을것인가.
패총은A.D 1-5 세기에 형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미로 하는 역사 매니어는 틀에맞는 역사가 가공되길 즐거워 하면서 잠시 생각해본다.

"금관가야"


김해 봉황동 유적은 경남 김해시
봉황동(발굴당시 김해읍 회현리(會峴里))에 있는 유적으로서 패총유적이다.
발굴된 조개더미에서 수많은 유적이 나옴으로서 김해패총(金海貝塚)으로 불리고 있다.

"금관가야"


"금관가야"


최초 발굴은 1907년(융희1년) 동양 사학자인 교토제국대학교수인 이마니시(今西龍)가 1920년과 1934~1935년에 걸쳐 매장지를 조사 발굴하면서 조개더미유적임이 드러난곳이다.(위키백과 부분인용)

2001년부터 김해시에서 경남발전연구원을 통해 실시해 온 봉황동유적지에서는 항만접안시설이 존재할 개연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며 가야국의 배를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금관가야"



"금관가야"



"금관가야"



현재 김해시가 금관가야국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해상교역국임을 암시하는 굴립주건물지가 다량 출토되었다.

봉황동 유적지와 대성동 고분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을 둘어본다면 유물들과 역사적 사료를 파악할 수 있다.

봉황동의 발굴품들은 붉은 토기(赤色土器)·회색 토기·신라 토기의 파편과 철부(鐵斧)·철도자(鐵刀子, 쇠 손칼) 및 특히 왕망 시대의 화천(貨泉) 등도 발견되어 철기 시대의 패총임이 증명된곳이다.

그리고 상식석관(箱式石棺)·옹관(甕棺)·세형동검(細形銅劍)·마제석촉(磨製石鏃) 등과 금석 병용기 말부터 ~ 삼국 고분기(三國古墳期)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는 5가야조를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성산가야(星山伽耶),소가야(小伽耶),금관가야(金官伽耶),비화가야(非火伽耶)라고 하는데 김해지역은 금관가야 지역이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금관국,아시라국(阿尸良國),대가야국(大加耶國) 으로 적혀있다.

이하 <출처:김해시청>

김해 봉황동유적지는 봉황대라고 불리는 구릉지와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생산유적으로서,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 패총과 합쳐진 이름이다.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仇衡王 [ 구형왕 ]
금관 가야의 마지막 임금. 겸지왕(鉗知王)의 아들. 23대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9(532)년 신라(新羅)의 공격(攻擊)을 받고 항복(降伏)하였음. 법흥왕(法興王)에게서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야국(伽倻國)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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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 과 우리나라

UN 공원

우리는 국제연합국의 일원이며 자랑스럽게도 세계 192개국을 회원국으로 하는 국제연합 즉 UN 의 사무총장을 반기문이라는 우리의 국민으로 배출한 나라이다.

여기서 UN을 설명 할려는 것이 아니고,
유난히 무덥던 약 반세기전의 우리가 전쟁으로 참담했던 때에 국제연합이 아무런 금전적 댓가없이 오직 이데올로기 만으로 뭉친 기적같은일을 되새겨 보면서 오늘날 의 국제연합과 인간적인 부분과 사상적인 것에서의 우리를 생각해 본다.

지금도 우리의 어느 계곡에서 그무더운 여름날 가없이 산하한 피부색다른 꽃다운 20~24세된 젊은이들은 부산의 작은 잔디받에 누워들 있다.

나는 부산 사람이지만 그때 그 전쟁을 눈으로 보고 어린 나이로 느낀 전쟁을 잘 기억한다.
그리고 가끔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발걸음도 한다.

지금 그 전쟁에 대해서 어필하기 힘든 세대에게 이야기할려고 하지는 않지만,
지금 우리는 말로는 글로벌시대에 산다고 하지만 크지 않은  우리 나라도 뭉치지 몯하고 저마다 갖가지 크고 작은 이익을 앞세워
무었이 장차 큰 것이며,
무었이 국가와 민족에게 최우선 순위인지 조차도 잊어 버리고 하루하루를 우왕좌왕 하면서 진리도없고 공식도 없이 진원지도 모르는 창살을 방패로 맊기에 급급하는 피곤한 조국을 보면서,

배고팠지만 사랑과 믿음과 작은 희망을 앞세워 오늘날이 있게한 선학님들에게 이 무더운 여름이 다 가기전에 반성하고 되새기 겠다고 다짐하는 축문을 이시대의 기성인으로서 부끄러운 맘으로 올립니다.

돌이켜 반성한다면 이시대의 젊은이들을 나무라는 말은 쉽게 하지만 조건이 비상식적인 현대 사회에서 나름대로 조율하며 살아가는  이시대의 젊은이는 과거의 단순 소조건에서 후학들에게 피력했던 생각을 앞세우는 기성인들의 사고가 먼저 바뀌는 것이 이시대의 고뇌를 푸는 시작이라는 생각도 반성이라면 반성이리라.

오늘날 많은 정치인이나 단체들이 애국 운운 한다.
건국 이래로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과 애국을 이야기 하고 있고,
아니 아예 조국과 애국에 대한 개념도 없는 부류도 많지만 ,
한번쯤은 그들이 목슴을 내놓고도 후회하지 않고 또 그들의동료가 부산을 방문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나는 가끔은 나 자신을 부끄러워 했다.

조국의 국력이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흩어지고 형편없는 국가로 전락하지는 않으리라 보지만 적어도 자기의 총으로 끊임없이 쏘아대는
실탄은 자기가 타고가는 보트의 바닥에 수없이 많은 구멍을 내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알 때는 분명코 늦으리라.

이시대의 선각자들이 과연,자기의 총탄이 구멍을 아무리 크게 뚫어도 보트가 가라앉지 않는 부위의 마지노 라인을 아는가?
나는 정부가 국가를 위해서 일잘하기를 바라지만 그들이 나와 똑같은 수준의 밥3끼먹는 사람이지 하늘에서 내려온 능력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몇 번이고 되새기면서, 작은 잔디받에 앉아 푸른 하늘에 나부끼는 16개국 국기를 처다본다.
그때 1,789,000명의 사자와 산자를 포함한 용사들을 위로한다.

부화뇌동 하지 않겟다고 다짐하는 이시대의 한사람으로서 그들에게 감사한다.신세대 분들도 곧 구세대가 됨을 알길 바라는 작은 바램을 가지고...
오늘 UN 공원 방문기를 접는다.

UN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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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하는 조선역사의 재고찰
조선은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총 519년동안 존재했던 나라임.

조선왕조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총 519년동안 존재했던 나라임.
때로는 근세조선,이씨조선 이라고도 함.
산군 해군
#종 은 나라를 덕으로 안전하게 유지한 임금에게 붙인다.
#조는 큰공을 나라에 보탠임금을 말한다.
#군은 제대로 왕의 책무를 다하지 몯해 하야한 임금을 말한다.



조선 왕위표 [ 1392년 7월 17일~ 1910년 8월 ]

1. 태 조 ( 1392. 7. 17~ 1398. 9. ) - 2. 정 종 ( 1398. 9 ~ 1400. 11 )
- 3. 태 종 ( 1400. 11~ 1423. 5  )- 4.  세 종 ( 1418~ 1450. 2. 17 )
-5. 문 종 ( 1450. 2. 17 ~ 1452. 5 ) - 6. 단 종 ( 1452. 5 ~ 1455)-

7. 세 조 ( 1455~ 1468. 9 )-  8. 예 종 ( 1468. 9~ 1469. 11)
-9. 성 종 ( 1469. 11~ 1494)  - 10. 연산군 ( 1494~ 1506. 10?)-11. 중 종 ( 1506. 10~ 1544. 11) - 12. 인 종 ( 1544. 11~ 1545. 7. 1)-13. 명 종 ( 1545. 7. 1~ 1567) - 14. 선 조( 1567~ 1608)-15. 광해군( 1608~1623)- 16. 인 조 ( 1623~ 1649. 5?)

17.효 종( 1649~ 1659. 5. 5 ) - 18. 현 종 ( 1659. 5. 5~ 1674. 8 )
-19. 숙 종( 1674. 8~ 1720 ) - 20. 경 종 ( 1720~ 1724)-21. 영조( 1724~ 1776. 3 ) - 22. 정 조 ( 1776. 3~ 1800. 12?)-

23. 순 조( 1800. 12?~ 1834) - 24. 헌 종( 1834~ 1849)
-25. 철 종( 1849~ 1863. 12. 8 )- 26. 고 종( 1863. 12.~ 1907. 7 )-

27. 순 종( 1907. 7~ 1910. 8 )


조선건국의 배경

고려말 이성계는 최영과 더불어 나라 최고의 무장이었다.

당시 정세 는 해군력이 쇠퇴하고 고려는 일본 해적 왜구가 해상권을 이용해서 배를 타고 전국해안에 수시로 출몰해서조선을 약탈하고 있었으며 그 세력이 강해서 중국 해안선을 따라서도 약탈을 하여 해안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나 조정에서 이들을 막지몯하고 있었다.

이때 최영과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무인이 득세하게 된다.

이무렵 1388년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가 요동을 접수 관리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오고 고려의 우왕은 이성계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한다.
(사실 정벌이 아니고 원래 고려땅을 방치하고 있다가 명이 공식적으로 편입하겠다고 하니까 되찾을려고 한것이며 고려에서는 중원의 나라를 겁내지 않았다)

이성계는 명령을 받아 출정을 하지만 평소 대륙을 원하지도 않았고 전쟁하기도 싫어했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역심이 생겨 좌군도 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돌리고 병력없는 텅빈 왕실에서 최영장군과 왕실을 몰아내고 고려를 접수하여 조선을 건국한다.
 
당시 고려 귀족들은 큰토지를 관리하며 호화롭게 살면서 소국가를 형성할만큼 큰세력으로 살면서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던때에 개혁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혁명하는 이성계는 개혁세력과 손잡고 회군함으로서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의 세력이 없어지고 명이 들어서는 때에  옛 조상들의땅 요동을 지배할수 있는 찬스를 버리게 된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성했던 인천에서의 외국무역을 차단하게된다.
고려 왕족들이 무역을 왕성하게 했던것을 완전히 봉쇄함으로서 조선은 대문을 굳게 닫는 쇄국국가로 바뀌게된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고려의 정책과는 완전히다른 노선으로 바뀌고 수비국가로 정책이 바뀌면서 도읍지를 안전한 남쪽으로 옮기게된다.

이성계는 국가정책을 쇄국으로 하면서 해상을 포기하여 국가의 조세품을 실은 자국배가 왜구때문에 조정까지 운반을 몯해서 왕실의 살림이 가나할정도 였다.

안으로는 굳게 문을 잠구고 이웃 강국에게는 대국으로 섬기면서 안위를 보장받는 이른바 사대주의를 시작하게 된다.
이성계는 쇄국정책과 사대주의를 병행함으로서 명나라가 망하지 않는한 국가가 안전할것으로 생각하게되고 그의 혁명을 반석위에 올리는데는 이 정책이 일조했다고 본다.

이야기거리:
이성계가 무학대사한테서 점지받은 부평에 도음을 정할려고 부평100개봉우리에 산신제를 지내고 백관과 더불어 도음을 정할려하자 한개의 봉우리가 너무나 원통해서 폭삭 주저앉아 버렸는데 그 봉우리 있던자리가 고개가 되어 지금은 원통이(만월산-동암역 앞산-처음에는 가장큰 주봉이었다고함)고개이다.

이성계는 완전히 방어에 안전한 100개봉우리가 둘러친 부평이 99개의 봉우리로 바뀐걸보고 한양으로 다시 도읍지를 바꾸게 된다.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해 출범해서 일본 제국주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방으로 1910년 멸망했다.

그 동안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했던 사람은 모두 27명이고 왕위에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후 왕에  추존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왕위에 있다가 제대로 하지몯하고 중도 하차한 왕이 둘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세운 군주를 즉 창업군주나 중흥군주에게 '조'라는 묘호를 부여했다.

왕위의 정통성에 문제가없이 계승한 군주에게는 '종'이란 묘호를 올린다. 
묘호란 조선시대에서 왕이 묻힌 무덤을 종묘라하고 종묘에서 제사를 드릴때 그 종묘에 봉안하는 위패의 이름이 곧 묘호다.

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세종이나 정조 등 왕의 명칭은 그 왕이 죽은  후에 후학이나 종친 사직에서 부여한 묘호의 이름인 것이다.

조선조에서 처음에'종'이었다가 후에 '조'로 바뀐 왕은 영조(영종), 정조(정종),순조(순종)가 있으며 고종처럼 자기맘대로 스스로 황제가 된 경우도 있다.

왕자에게는 '군'이란 칭호를 주는고,정식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대군',빈(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군으로 호칭한다.
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왕에서 쫓겨난 서자왕자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딸의 경우 정식 왕비 소생에게는 '공주'를, 후궁 소생에게는 '옹주'라는 칭호를 주었다.
왕이사망한 후 편찬되는 재임시절의 공식 기록을 담은 실록은
폐위된 임금은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실록 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인다.
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등 '실록'이 아닌 '일기'가 두 편 포함되어 있다.오늘날 단종으로 불리는 조선조 6대 왕은
세조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은지 2백년도 더 지난 숙종 24년(1698)에야 단종으로 복원되웠고, 실록 명도  '노산군일기'에서 '단종대왕실록'으로 바뀌었다

(이때 고려조 충신 진주정씨의 정분(당시 우의정)님도 복권되었다 - 현재 정분님(애일당)의 묘소는 진주 비봉산에 있으며 그분의 아버지,그분의 할아버지 와 함께 3대묘 고분군으로 문화재로 봉안되고 있다 - 관리 세덕사 ).
** 조선이 건국하면서 역적으로 처형했던 인물을 조선이 다시 충신으로 봉안한 인물임 **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호칭에서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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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불과 혼불

나는 어린시절 맑은 물이 흐르고 지척에 연못이 있는 작은 시골 동리의 큰 대밭이 있는 집에 살았다.
저녁이면 할아버지와 멧둥에 나가 내게 지식이 될만한 이야기며 가족에 대한 이야기며 선조에대한 이야기를 할아버지가 들려 주시면 밤 가는줄 모르고 재미 있게 듣곤 하면서 한여름을 보냈다.

해마다 지금처럼 무더운 날에는 그때 그분이 그립고 ,그분이 하신 말씀을 나의 대에서 자식에게 전하는 일을 끊는것 같아 할아버님께 죄송 하다.

밤은 깊어가고 열기도 가실쯤에 할아버지와 나의 머리위로 느닷없이 스치는 붉은 불덩이 !
불과 15m(어린나이에 기억한 높이이니 더 가까울수도있다)정도의 머리위로 지나가는 노랑빛나는 붉은 불덩이를 본다.
어떤때는 가늘고 긴 청적색 불덩이도 본다.

혼불혼불
 본것을 기억을 더듬어 그린 혼불


여름이 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때까지 할아버지와 나는 이런 불덩이를 3~4개는 본다.
지금 생각하면 혜성처럼 생겼다고 하는것이 젤 정확하다.
크기는 가까울땐 3 m 정도크기로, 멀리 20m정도나 이웃마을에서 나타날때는 30Cm 정도크기로 보인다 .

정확히 구분하지는 몯하지만 약간 푸른빛이 감도는 붉은 불은 이무기 가 지나가는것이라고 했으며,노랑빛이 나는 붉은 불 덩이는 혼불이라 했는데,
혼불을 본지 보름 이내에는 인근 마을이나 우리동네의 아픈분이 세상을 떠난다.

나는 어린 나이(중1생)이지만 깜깜한 밤에 초롱초롱 빛나는 밤하늘에서 무한 상상력을 키우고 할아버지가 하는말과 나의 신학문을 점목하며 나를 발견하는 행복한 삶이 오늘 이 무더운 여름날에  그립고 그리워 저서 그때 본것을 더듬어 글로 쓴다.

어느 무덥고 바람한점 없는 여름 초저녁에,
 흥미있는 연출을 본다.
이글도 이 연출을 글로 쓰기 위해서이다.

낮에는 어떤사람이 무었을 하는가 정도는 분간할수 있는 거리에 평소에는 마른 개울이지만 비올땐 물이 넘치는 개울둑이 시야에서 가로로 지나간다.

무덥고 찝찝한 여름 초저녁 식구들은 마당앞에서 보이지않는 저건너 뚝쪽으로 쭉 느러서서  금방먹은 저녁 식사가 소화되길 기다리며 담소하고 있는데,

두개의 작은 불빛이 솟아오른다.

나는 할아버지로 부터배워서 적어도 혼불은 분간하는데 이건 아니다.
좀 노랑빛이 더 강하며 불꽃도 혼불처럼 꼬리가 사라지는 형태가 아니고 늘어지면서 붙어다니는 형태이다.
마치 멀리서 쥐불놀이하는 것처럼보인다.

아 ! 3개 6개 아니 10개의 불꽃이 순식간에 불어나고 좌우로 갈라저서 한무리는 아랫족으로 한무리는 윘쪽으로 달린다.

빠르게 달릴때도,서서히 달릴때도 ,껑충껑충 뛸때도,빙글빙글 돌때도 있다.
중앙으로 갑자기 모여 하나가 되어 솓구치다가 즉시 작은 것들로 분해해서 둑을타고 아래위로 내달린다.
우리 식구는 할아버지,할머니,어머니,사촌동생,숙모,나 이렇게 많은 대가족인데,
다같이 이광경을보고 있다.
나는 이 황홀한 광경을 놓지고 싶지않은데 소변이 마렵다.
그쪽으로 보면서 소변줄기를 쏘는데 ,
숙모님이 그러면 도깨비가 달려온다는 이야기에 그만 소변을 그쳤다.

이 아름다운  불꽃 쑈는 그 규모는 다르지만 무더운 여름 밤엔 가끔 연출된다.
내가 커서 고등학교를 부산에 유학으로 하는데,
이때부터 이이야기는 억울 하게도 거짖말로 바뀌게 된다.
아무도 믿지 않기 때문이다.
비로소 나는 아무리 사실 이라도 다수가 아니라고 하면 사실이 아니게 된다는 것을 배웠고
다시는 도시 친구들 에게 한여름밤의 도깨불 본 이야기를 하지 않게 되었다가,
지금 이제사 글로서 쓴다.  

나는 종손이라 나의 사촌들이 제사 모시러 오는데,
그때본 이야기를 너희들도 하느냐 고 물어 봤는데,
아무도 그이야기를 하지 않는다고 했다.
우리는 과학과 현대 문명에 의해서 우리가 본것을 말하면 바보가 되는일이 많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나와 나의 사촌들은 이 이야기를 하지않고 살지만 지금은 현대문명이 이런글을 쓸수있게 해 주는것은 어쩌면 아이러니 라고 할수 있습니다.

고온 고습도로 인이 발화점에 도달하면 자연속에 흩어저있는 인이 불타는 증상이 돋개비불이라고 학교에서 배웠지만 마음속으로 그런 과학적 이론을 말한분이 이 불꽃쑈를 봤다면 절대로 그리 말하지 않을것이라고 그때 호기심많은 중학생은 이미 결론 내리고 있었다.

여담으로 하나더 이야기 한다.
우리동네에서 장에갈려면 하나의 산고개를 넘어야하고 그고갯길은 내가 중학교 가는길인데 14살먹은 아이들의 걸음으로 50분정도 걸린다.
어느 장날 우리동네 건장한 아저씨가 고기 몇근을 사서 집으로 오다가 고개밑의 주막에서 술한잔 하시다가 밤이되어서 고갤넘는데 인근에서는 겁날게없는 큰덩치의 그분에게 검은 몇놈이 나타나서 고길 주고 가든지 한판붙든지 해서 그분은 밤새 붙어 기진맥진 하면서도 가족을위해 산 고길 뺏기지 않을려고 애썻지만,

결국 흥정을 하고 조금 떼어주고 오는데 10분마다 다시 붙자고 하고 그때마다 고길조금씩 떼어 주는데 집에 다왔을 때에는 이미  고기는 마지막남은 한덩이밖에 없었다.

그런데도 또 달라고 따라오는 놈들에게 화가 머리끗까지 치밀어 고함을치며 큰 돌을 마구 던저서 마을 분들이 다 알게된 일도 있었다.
다음날 일찍 고개를 넘은분은 길바닥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는 고기를 본다.

마음속에 묻어둔 한여름밤 생각나는 나의 어린시절이야기.


혼불혼불



Posted by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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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111.com BlogIcon 오디세우스 2011.06.20 00:3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희 어머니께서도 둥실 둥실 산을 오가는 혼불을 흔히 보셨다고 합니다.

  2. 혼불정말 궁금해 2014.03.23 22: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고등학교 시절 그림과 같은 것을 보았지요
    분명히 제 머리 위로 지나가는것을요
    제 머리는 정말 바짝 섰고 누군가에게 물어보니 혼불이라고 하더군요
    혼불이 보이면 누군가 죽어나간다고요
    전 사실 교회를 다니는 사람입니다
    철야예배를 드리고 나와서 본거라
    어떤 집에서 혼불이 나왔고 교회쪽으로 가는 혼불을 보았지요
    이미지와 같은 혼불이였답니다
    누구한테도 이야기 하지 못하고 늘 뭐지 뭘까?
    궁금했답니다
    저랑 같은 경우가 있네요
    그래서 한자 적습니다...

    •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강물처럼 바람처럼 2014.03.23 22:5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혼불이나 도깨비불을 본사람은 많이 있을것이지만 말 몯할 뿐이지요.오랜전 여름밤에 내 동생들도 함께 본 일이지만 요새는 아무도 그일을 말하지 않습니다. 바보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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