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의 고장 고령박물관과 지산리 고분 탐방 
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탐방. 

경북고령군 고령읍 대가야로 1203 지산리460
전화 054-950-6071~3

가야국은 어떤나라인가?

가야국의 시조,수도,존재기간(加耶國의 始祖와 首都)

562년까지 낙동강을 끼고 그 서안 지역에 있던 여러 소규모 정치세력이나 작은 국가형태의 정치세력들을 지칭해서 가야국 이라고 합니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잇습니다.
각 표기들이 지니는 의미는 한자어대로만 풀이해서는 안될것이며 차이 또한 확실히 모르지만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인 삼국지에 구야국으로 기록된것이 적용되는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가라(加羅)로 되어 있고 중국과의 공식적인 통교사실을 기록한 남제서에 加羅로 표기된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당시 사용되던 공식 국명은 ‘가야’가 아니라 ‘가라’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에는 가야란 명칭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가야(함안),고녕가야(함녕),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삼국유사는 주로 가야(伽耶)로, 삼국사기는 가야(加耶) 또는 가라(加羅)로 쓰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라 가야(加耶)로 통일해서 사용하기로 하는 추세입니다.

가야에 관한 역사책은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인물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원본은 없으며 이 책에서 발췌해서 정리한것으로 알려진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는 일찍이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발달해서 풍부한 철을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한것입니다.

특히 이 시대 가야 문화는 일본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납니다.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당시 가야의 국력과 왕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게됩니다.

안타갑게도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과 다르게 많은 가야가 하나로 통일되지못하고 지역별로 분립된 상태로 지속하다가 멸망하게됩니다.

가야 소국들 전체가 신라와 백제로 모두 흡수되거나 멸망 됩니다.

대가야역사관,왕릉전시관경북고령군 고령읍 대가야로 1203 지산리460 전화 054-950-6071~3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지역의 정치세력들은 각각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로 지역 연맹체로 지속되지만 통일 국가로 결합하지못한것입니다.

오직 대가야는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 까지 가장 강력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고대국가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세력으로 발전했다고 알려집니다.



대가야(大加耶)는 어떤나라인가?

경 북 고령을 도읍으로 하고 있던 나라로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시조 이진아시왕에서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하는것입니다.

현재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권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자료로 봅니다.
또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하는데 이는 3세기 중엽까지는 김해의 금관국이 가장 강력했던터라 이를 대가야가 계승했다는 정통성을 주장 하는것으로도 생각됩니다.

5세기 후반에 대가야는 현재의 고령, 합천,거창,함양,남원,하동,구례, 진안 등 까지를 영토로 하는 큰 나라로 발전한 것입니다.

중국의 남제서 동이전 가라국조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고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대가야는 중국과 교류를 하는 국가적인 형태의 세력이라는것을 알 수있습니다.

481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에 침입했을 때 대가야가 백제군과 함께 출병해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내용도잇습니다.
그러나 가야권 전체를 통합하지는 못하고 
562년 멸망하게됩니다.

가야국 지도4국시대 대가야 지도

대가야대가야

지산리고분지산리고분


◙.대가야 원문

高靈郡 本大加耶國 自始祖伊珍阿시王一云內珍朱智至道設智王 凡十六世 五百二十年 眞興大王侵滅之 以其地爲大加耶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二 冶爐縣 本赤火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新復縣 本加尸兮縣 景德王改名 今未詳」

고대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가야국(加耶國)이 언급되지만 ,많은 가야국 중에서 시조(始祖)가 명확히 이름으로  기록된 가야국은 금관가야(金官加耶),고령가야(高靈加耶) 두개 뿐이다.

현재 행정구역 고령군은 대가야국의 본역지이다.
시조 이진아시왕(다른이름:내진주지) 을 시작으로 도설지왕까지 모두 16세 520년의 역사를 가진 강력한 남부지역의 일국이다.
진흥왕이 침공하여 멸망시키기까지 가야국으로서는 신라를 위태롭게하며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가장 강력한 가야국이었다.

대가야는 2현의 지방으로 구성되고 현재행정구역명 합천군 야로면은 야로현이었으며  그때 적화현인이었고,
신부현은 원래는 가시혜현인데 경덕왕 때 지명을 고친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야로는 지금 그대로임으로 정확히 알수 있지만 신부현은 사학자들의 엇갈린 해석은 있어도 현재지역을 정확히 추정할수 없는 형편이다.

◙.금관가야.
金海小京 古金官國一云伽落國 一云伽耶 自始祖首露王至十世仇亥王 以梁中大通四年新羅法興王十九年 率百姓來降 以其地爲金官郡 文武王二十年永隆元年爲小京 景德王改名金海京 今金州

김해의 작은수도는 옛날의 금관국(혹은 가락국,가야라고함)이다.
시조는 수로왕이며 10대 구해왕이 신라 법흥왕(19년,532년)에게 백성을 데리고 항복해서 신라와 병합됨.
이후 금관가야는 금관군으로 개칭되었다.
문무왕 20년에는 소수도로 격상되고  경덕왕 때는 김해경으로 개칭되며 이후 지금의 금주로 불린다.

고녕가야.
古寧郡 本古寧加耶國 新羅取之 爲古冬攬郡一云古陵縣景德王改名 今咸寧郡 領縣三 嘉善縣 本加害縣 景德王改名 今加恩縣 冠山縣 本冠縣一云冠文縣 景德王改名 今聞慶縣 虎溪縣 本虎側縣 景德王改名 今因之」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이다 라고 기록된바.
이를 신라가 정복해서 고동람군(또는 고릉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했다.
지금의 행정구역 명칭은 함녕군이다.
당시 3현으로 구성된 고녕가야이었는데,
@가해현을 가선현으로, 가해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고 이후 가은현임.
@관현(또는 관문현)을 관산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함, 이후 문경현임.
@호측현은 호계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하고 이후 그대로 사용함.

.화왕군
비자화군(비사벌)은 화왕군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에 주로 바꾸고 이름을 하주(下州)라 했는데,
경덕왕 26년(565년)에 주를 철폐하고 개칭하며 지금의 창녕군이다.
추량화현(삼량화)은 현효현으로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현풍현이며 현재행정구역 현풍임.

.고성군

固城郡 本古自郡 景德王改名 今因之 領縣三 蚊火良縣 今未詳 泗水縣 本史勿縣 景德王改名 今泗州 尙善縣 本一善縣 景德王改名 今永善縣」
고성군은 고자군(古自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칭되었고 이후 그대로 쓰며 3현의 행정구역이었다.
문화량현(蚊火良縣)은 지금의 어디인지 모른다.

사수현은 본래 사물현이었고 ,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사주(泗州)이다.
.상선현은 본래 일선현이었고 ,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영선현이다.
.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을 일으켜 아시라국(阿尸良國)(阿那加耶)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군으로 만들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함. 이후 그대로 쓴다. 2현의 행정구역이었다.
. 현무현은 본래 소삼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함.이후 소삼부곡이다.
.의녕현은 본래 장함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그대로 쓴다.

.성산군은 본래 일리군(一利郡)(里山郡)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가리현임. 4현의 행정구역.
.수동현은 본래 사동화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짐역 미상임.
.계자현은 본래 대목현인데 경덕돵 때 개칭 이후 약목현임
.신안현은 본래 본피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경산부임
.도산현은 본래 적산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지역 미상임.

아라가야("羅"를 "耶"로 쓰기도 함. 지금의 함안),
고령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지금의 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혹은 벽진이라고도 함),
소가야(지금의 고성).

주: "태조 천복 5년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김해부가 되었다),
둘째 고령(가리현이 되었다),
셋째 비화(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의 잘못인 듯 싶다),
넷째 아라 가야
다섯째 성산(혹은 벽진가야)이다.

가락기에서 ,
자색 끈 한 가닥이 하늘에서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내렸는데, 5개는 각 읍으로 돌아가고 ,
하나는 이 성에 있게 되었다고 했고.
그중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5개는 각기 5가야의 군주가 되었다고 했는데,

금관가야는 이 5의 숫자에 계산하지 않은 것 이지요.
그런데 가끔 사해에서 금관가야 까지 그 숫자에 더해서 넣고 창녕가야 까지 기록한것은 실수 한 것으로 봄.




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지산리고분군


■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이란?

지산동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분포하는 거대한 무덤들의 집합체를 말합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읍을 감싸는 주산성(主山城)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과 가지 능선에 걸쳐 넓게 퍼져 있습니다. 주산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 위,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크고 작은 고분 수백 기가 남아있습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뿐만 아니라 가야지역 전체에서도 가장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써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에 대한 첫 발굴조사는 1906년 세키노(關野貞)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로이타(黑板勝美), 이마니시(今西龍), 사이토(齊忠) 등의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 1976년 고령군 공보실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 정화작업 이후 외형이 확실하고 비교적 큰 고분에 한해 일련번호를 매겼습니다.
이 가운데 44·45호분은 1977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의 합동발굴조사단이 발굴, 조사를 했고, 32·35호분은 1978년에 계명대학교에서 조사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이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인 44분과 45호분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묘제상 중요한 자료인 이들 순장묘가 발굴됨으로써 한국고대사에서 문헌상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순장 기록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44호분에서는 30여 명 이상의 순장자가 묻혀 있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의 주된 무덤 형식은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입니다. 이 고분군의 무덤들 가운데 3기만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입니다. 이들 고분군에서는 '고령식', '대가야식'으로 불리는 여러 종류의 토기류와 철제의 이기(利器), 마구류, 고령의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금동제 관장식, 금은장신구, 옥류, 청동제 거울, 청동합(靑銅盒) 등 최고급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여지는 등잔도 출토되어 대가야가 이들 국가와 대외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의 기록으로 이 고분군은 대체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산동고분군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32호 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입니다. 이관은 관대의 앞면에 반월모양의 장식물을 세워 두었는데, 그 세움장식에는 꽃가지 모양의 장식이 좌우로 각각 하나씩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후꾸이현 니혼마쯔야마 고분에서 이 32호분 출토 금동관과 같은 계보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금동관이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요컨대 대가야와 일본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형의 금동관들은 5세기 무렵에 두 나라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아주 귀중한 유물인 것입니다.

■  지산동 44호분은?

지산동 44호분은 주산이 경사져 내리는 끝 부분의 비교적 넓고 평평한 땅에 걸쳐 있어 다른 고분들보다 더욱 우뚝 솟아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고분의 아래쪽은 급경사여서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위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고 완만하게 경사가 져 있습니다. 45호분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지점입니다.
이 고분은 가운데에 으뜸돌방〔主石室〕1기와 딸린돌방〔副葬石室〕2기의 큰 돌방〔石室〕을 만들고, 주위에 작은 돌덧널〔石槨〕32기를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다음 타원형 둘레돌〔護石〕로 이들 모두를 둘러싼 다곽분(多槨墳)입니다. 순장자는 32기의 작은 돌덧널에 순장되어 있고, 그 외에 으뜸돌방과 딸린 돌방에도 1명 이상씩 묻혀있어 적어도 36명 이상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도굴로 인해 매장 당시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뚜껑접시, 그릇받침 등의 토기류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딸린돌방인 남쪽 돌방에는 대형그릇받침 18개가 집중적으로 나왔습니다. 이밖에 투구를 비롯한 철제무기류, 말띠드리개, 금제귀걸이, 청동그릇과 다양한 종류의 옥 제품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이는 등잔 한 점과 일본 오키나와제도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왔습니다. 이 유물들은 대가야가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기록으로 볼 때 이 고분은 5세기 중,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  지산동 45호분은?

45호분은 주산이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 뻗기 시작하는 돌출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44호분에서 산 위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 고분은 가운데에 두 개의 큰 돌방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외곽에 11개의 돌덧널을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한 다곽식 무덤입니다. 돌덧널 외곽에는 둘레돌을 둘렀습니다. 으뜸돌방은 암반을 깊게 파고 네 벽을 큼직한 깬돌〔割石〕로 고르게 쌓았는데, 길이와 너비의 비가 4.5 : 1인 좁고 긴 구덩식돌방입니다. 이런 모양의 돌방은 고령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가야양식의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45호분의 규모는 긴 지름이 28.2m, 짧은 지름이 25.7m, 뚜껑돌〔蓋石〕위에서의 높이가 2.8m입니다. 도굴당했기 때문에 껴묻거리의 상당수가 없어졌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유물이 꽤 있었습니다. 굽다리접시 등의 각종 토기류를 비롯하여 금동관식(金銅冠飾), 금제귀걸이, 말안장, 재갈, 말띠꾸미개, 은으로 장식된 고리손잡이큰칼의 손잡이부분, 쇠창, 각종 청동제품 등이 으뜸돌방에서 나왔습니다.
이 무덤도 역시 순장묘로, 11기의 돌덧널 외에 으뜸돌방에 2명 이상, 딸린돌방에 1명 이상의 순장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금귀걸이와 목걸이를 걸고 있어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순장했으리라고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이 무덤은 대략 5세기 중, 후반경에 만들어졌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산동 45호분지산동 45호분 금동관식(金銅冠飾)


■  지산동 32호분은?

32호분은 큰 무덤들이 자리하는 주산의 주능선이 급경사로 내려와 넓고 평평한 형상을 이루는 구릉 정상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32∼35호분으로 이름 붙여진 4기의 고분이 300여 평의 면적 안에 서로 2∼3m 간격을 두고 모여 있습니다.
이 고분은 묘역 가운데에 돌방 1기와 돌덧널 1기를 나란히 배치한 다곽분으로, 주위에 길이 11.2m의 타원형으로 둘레돌을 돌려 놓았습니다. 봉토는 긴지름이 13.1m, 짧은지름이 12.6m, 높이는 뚜껑돌 윗면에서부터 1.5m입니다. 돌방은 두껍고 납작한 직사각형의 깬돌로 네 벽을 엇물리게 쌓았으며, 넓고 편평한 깬돌 10매로 뚜껑돌을 덮었습니다.
32호분에서는 뚜껑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바리형그릇받침, 큰 합 안에 작은 합들이 들어있는 모자합(母子盒) 등의 토기류와 갑옷과 투구, 고리손잡이큰칼, 발걸이, 청동방울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나뭇가지모양의 세움장식을 한 금동관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돌방 가운데에 안치된 나무곽 속에 동북방향으로 눕혀 있었으며, 껴묻거리의 성격으로 보아 남성으로 생각됩니다. 주인공의 발치쪽 껴묻거리 속에는 또 한사람의 피장자가 있었는데 아마도 순장된 사람일 것입니다. 순장자는 돌방에 1명, 순장 돌덧널에 1명으로 총 2명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고분은 5세기 중반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령박물관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이상 포스팅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공부하며 온라인에서 자료를 모아 편집한것이며 학술적인 신뢰도가 없음으로 인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행,관광,지역소개] - 가락국-가야국-구야국

[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 가야국탐방(2) - 기록으로 보는 금관가야

[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주는 지산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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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양뿔잔

가야문화의 진수를 본다-복천동고분


복천동고분 7호분에서 출토된 말모양뿔잔은 현재 우리가 보드라도 감탄할 만큼 추상적이기도하고 특이하게 만든 그때 그사람들의 작품이다.

그시절 5세기경이라면 언듯 생각하기는 형편없는 문화수준의 미개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생각할수도 있으나 출토된 유물들로 볼때 현대교육을 받고 전문적으로 만드는 어느 예술가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우수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술잔을 만드는데 그냥 아무렇게나 만든게 아니고 당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인 말모양을 카피해서 만든것이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만든다면 예를 들어서 페라리모양 술잔이나 BMW모양 술잔에 비교할 수도 있다.

 

The Ancients Cultural relic of KOREA

N0 7 Tumulus Bockcheon-dong BUSAN

5 Century ,한국의 고대문화유산,말모양뿔잔 5세기,복천동 제7고분 출토,韓国古代文化遺物,韩国古文化遗存


말모양뿔잔-5세기작품말모양뿔잔-5세기작품 가야문화의 진수를 본다-복천동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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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테리 형상인 가야유물

The Ancients Cultural relic of KOREA 


복천박물관이 가까운곳에 있어 가끔 둘러 보는 편인데,특별한 이벤트나 전시회를 할때는 가보곤한다.

그러나 상시 전시품 중에서 신발모양 토기가 있는데 이 히안한 모양의 토기를 볼때는 항상 의문이 생기고 또 미스테릭한 부분이 하나둘이 아니라서 한참을 바라보곤한다.


5세기경이라고 하면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겨우 집단생활이 자리잡고 작은 국가로서 지도자가 형성되고 열악한 농경생활을 하는정도의 시기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 토기를 보면 상당한 문화생활을하면서 하나의 장식품으로 만든작품으로 밖에 생각이 안된다.

무슨용도로 사용하든 집기로 생각한다면 너무도 설명이 부족하다.

과연 고대인들이 이 히안하게 생긴 토기로 무었을하려고 만든것일까?

똑똑한 현대인들의 머리로 생각해 보세요..


밤그릇이나 물그릇이나 잔은 아니다.

그렇다고 전쟁하는 무기는 더욱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이 유물은 부산복천동고분 53호에서 출토된 신발모양 토기라고 명명한 가야 유물입니다.


5세기경 가야인들이 만든것인데 복천박물관에 갈때마다 보면서 경이를 느끼는 작품이다.

고대인들이 이 작품을 생활도구로 만들지는 않았을것이라면 지금처럼 권력자의 인테리어를 위한 장식용 작품이란말인가..


신발모양 토기미스테리 형상인 가야유물 The Ancients Cultural relic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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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zomzom.tistory.com BlogIcon 좀좀이 2014.07.24 15:2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저것은 정말 장식 소품으로 사용했던 것 같은데요? 일상 생활에서 사용했던 소품으로 보기에는 너무 실용성이 없어 보여요...

  2.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4.07.24 15: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러게 말입니다,고대인들의 권력자가 장식용으로 즐긴 소품이라고 보는게 가장 적절하겠지요..그렇다면 그들의 문화수준이 경장하다는..

  3. BlogIcon 김수년 2014.07.26 02: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다용도 그릇같네요~ 곡물도 담아 먹고, 물도 담고~
    장식용이 아닌 실생활에서 다양하게 활용할수 있겠네요~~


대가야 이야기- 미나미지로의 웃을수도 없는 비석 


미나미지로는 일제 강점기때 제7대 조선총독이다. 
지금은 이미 허위임이 증명된 임나일본설을 믿은 나머지 대가야의 유적지 고령의 향교 부근에 임나대가야성지任那大伽倻國城址)라는 커다란 비석을 자기이름(南 次?(남차랑) みなみ じろう,)으로 세우고 대가야가 자기들의 옛 터전이라는 인식으로 벌린 웃지도몯할 해프닝을 연출한 자이다. 

임나일본이란 대략 4세기~6세기에 가야가 위치한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가설인데, 미나미 지로의 임나 비석은 바로 이를 근거로 잘못된 역사적 인식에 따라서 고대사의 일부를 자기들 편의대로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 벌린 일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점령할 명분을 고착시키고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안깐 힘을 쓰면서 근거를 마련하려 했을 당시에, 역사적으로 자기네 연고지를 찾는다는 구실을 세우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환으로 전혀 사실관계가 정립될 수 없는 역사적인 오류를 무시하고, 임나대가야성지(任那大伽倻國城址)라는 지역을 합리화 하기 위해 고령의 대형고분들을 발굴이라는 허울아래 마구 훼손하였지만 학술적으로 임나 일본이 성립될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몯한채 정치적인 힘으로 기정사실인 것처럼 왜곡한다. 

대가야 지산리고분



그는 전후 A급 전법으로 분류되어 형을 산 자이며 조선총독중에서 가장 악랄한 군인정치가이다.그의 악행 중에는 인류역사상 전무 후무한 창씨개명을 실시한 자이다.사람의 성을 바꾸라는 지시를 내린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실행한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는 역사적으로 볼 때 잘 다루지 않은 한 부분으로서 최근에 발굴을 토대로 한 역사가 빛을 보며 이야기되고 있는 지역이며 그곳의 독특한 문화는 알아볼수록 대단했던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사실 가야는 엄연히 존재한 큰 나라였지만 정사(正史)에 언급이 없고 유사(遺史)에 금관가야와 함께 건국 부분이 기록된 것이 조금 있어 알고 있을뿐이다. 

대가야 인들이 남겨 논 고분군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지만 숲속에 훼손되어 사라지고 농경지 아래 묻혀진 많은 것들을 다 찾을 수는 없겠지만 1만기도 넘을 것으로도 말하곤 한다. 

앞으로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청천이 후손들이 발굴해 가면서 우리의 묻혀진 역사가 제대로 밝혀질 것으로 믿지만 이렇게 잊혀진 역사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역사가 쓰여질 당시의 청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우리의 광대하고 엄연한 고구려역사를 왜곡하는 이른 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이 시작되고 있다. 세월이 가고 그 증거가 명백히 드러나면 그들 스스로 역사의 진실을 무시한 오류를 인정랄지는 모르지만 먼저 우리가 우리의 국력을 키워서 우리역사를 똑바로 지켜 내는 것이 먼저 일것이다. 

우리가 힘이 모자랄때 역사의 진실까지 바꿔치기 하려든 것을 잊어서는 안되며 우리의 역사와 그 속에 면면이 흐르는 선조들의 정신까지도 국력이 그것을 지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지금도 일본은 영토에 관해 억지를 부리는 파렴치를계속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웃나라들에게 착하고 진실되게 행동하라고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며 우리의 힘으로 우리것을 지키고 잘못을 징벌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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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지로의 악행과 경력. 

제7대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1936년 8월 5일-1942년 5월 28일)출몰(出沒):미나미 지로(일본어: 南 次? みなみ じろう, 남차랑, 1874년 8월 10일 ~ 1955년 12월 5일). 

내선일체라는 허울로 위장해서 조선을 괴롭히고 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강제로 징용해서 청년들을 중일 전쟁에 참전시켰고 일본어를 강제사용하게 했으며 악명높은 창씨개명을 주도했고 신사참배,이른바 황국신민의 서사라는것을 암송하게 하는 등 민족정신 자체를 말살하는 정책을 강행한 자이다. 

겉으로는 자율적이라는 허울로 기만하며 시행한 창씨개명의 극심한 반대에 부딭혔고 1942년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역대 조선 총독 중 가장 악독 잔인하고 혹독한 통솔정치를 한 자이며 종전 후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했으나 노령 및 건강 악화로 석방된 뒤 곧 사망했다. 

일반인으로서 고고학 강의를 듣고 배운 지식으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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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탐방때 느낀 기분 좋은 경남 김해시의 박물관도우미


김해박물관


나는 김해의 가야사부분 역사유물을 볼려고 날을 받아 작정하고 갔다.
대충 아는 김해의 역사 유적지의 위치상으로 자동차가 더 귀찮을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인터넷 지도를 검색해서 터미널에서 제일가깝게 나와 있었던 봉화유적지를 둘러 봤다.
안내인이 없어도 둘러보고 이해하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떤사람에게 물어서 도보로 대성고분 박물관에 도착했다.
나는 역사 박물관을 둘러보는데는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으로 잘 둘러볼수 있고 무었이 잘되어 있고 무었이 형식적인 치장으로 생색내기 유물전 인지는 잘 안다.

경남과 부산에 산재한 가야사 유물은 거의 대동소이 하나 약간식 특색은 있다.
그래도 김해 유적의 분량은 지금까지 모두 수량이나 질에서 만만찮다.

역사 박물관은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나,문화유물이나,또는 왜곡될수도 있는 귀중한 역사 바로알기를 위해서 국민누구나 접근이 쉽고 제한 하는 것 들이 없을때 그 효과가 극대화 되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리라고 항상 생각하고 어떤때는 아무 힘없는 안내인에게 나무라기 까지했었는데,..

김해는 발전된 현대 박물관의 매너를 안내인들의 태도에서 느낄수 있었다.
관람객이 들어오든 말든 하는 곳도 있는데 여기서는 벌떡일어나서(안일어 나고 멀끄미처다봐도 나쁜것은 아님) 무었을 안내하면 되겠는가를 물으면서 보여주는 친절한 행동과 말씨에서 첨부터 기분이 좋다.

그 사람들이 공무원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내가 말 할려고 하는것은 김해를 이야기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김해 가야사 유물을 다 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초~중년 아주머니 직원의 친절한 안내와 손수 메모를 해주는 수고를 함으로서 그날(지난주)가야사 유물을 시간적으로 시행착오 없이 잘 둘러 봤으며 오늘 이글을 쓴다.
그중에서 산꼭대기 부분은 다음 계획때 가기로 하고 그날은 보류 했었다.

아래는 내가 가는 방향에서 적절한 순서를 쓴 그분의 메모지 사진이다.물론 그분은 이 메모지 이외에도 많은 말을 내게 해 줬다.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물론 이 이외에도 박물관 입장료 해봐야 부산의 500원 받는것은 상징적인 의미이지 입장료가 비싸다곤 생각지 않는다.

김해는 그냥 Free 라고 적혀있다.
이 작은 돈 도 안받는다고 입구에 적혀있는것은 그만큼 리미트가 하나더 없어 진것 임으로 기분좋다.
줄서고 표사고 입장권 체킹하는 제한을 없앴다는 의미로 본다.
작년에 답사했던 어느 박물관은  몇천원을 받는곳도 있었고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곳 도 아직 있다.

카메라 성능이 좋기 때문에 후래쉬 없이도 얼마든지 찍을수 있는 우리 역사 유물을 제발로 공부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공책에 그림으로 그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사진은 찍지 말라고 하는 곳도 여기 김해 말고는 아직은 있었다.

구태 행정 편의주의에서 완전히 탈바꿈한 선진 김해시를 잠간동안 부러워 했다.
내가 그날 달랑 메모지 하나 받고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후 김해의 많은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만나는 모든 종사자들의 웃음이 만면한 친절과 아무 관계가 없는 능 주변의 어느 통장(뒤에안사실)님까지도 멀 하나 더 말해주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을 볼때 자기고장을 자랑하는데 애쓰는 모습 으로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스마일 김해 바이러스가 퍼젓는진 몰라도 마지막 길을 물은 롯데캐슬 아래의 어느 카센타 종업원 까지도 길가에 나와서 손짖까지 하면서 안내 하여 주었다.

지자체의 병페도 많다.
그러나 오늘 김해를 본 후에 지자체가 독창적으로 이만큼 외지 인에게 좋게 보일수도 있고 거국적 효과로 어떤 사안이 처리 될 수도 있구나 하고 오늘날 까지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부끄러워 한다.

김해 가야사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일본과 맞물려 있는 체인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포함된 곳이며 우리 후학들은 삼국시대 언저리에 결코 작지않은 제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가야제국에 대해서 알고자 할때에 행정이 제공할수 있는 모든 제한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여기 김해는 실천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는 사실을 말하는데 어디 중요하지 않고 더 중요한것이 있겠는가 마는 우리의 국민들이 스스로 관심가지고 역사의 현장에 까지 와서 머뭇 거리지 말게 해 줌으로서 먼 훗날 무지 때문에 "어찌 이런일이 일러나는가" 하고 후회 하지 않게 해 주는것은 그 관련 행정관서에서 부터 전 관련분들의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오늘 김해의 가야사 탑방을 하고 그 종사자 분들의 친절에 감사 드리며 이 글을 쓴다.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가야국탐방바로가기-1:
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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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여기 설명된 내용들은 김해박물관을 방문하여 그 안내문이나 책자와 김해시 자료를 토대로 삼국유사의 내용과 우리의 설화및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기술하였으며 역사 전문가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인용하지 마시길 바라니다.

김해 가락국 역사와 박물관 소장의 유물들을 보면서 가야사를 더듬어 먼저 삼국유사를 찾아 봤다.
길게 쓰여지지않은 가야건국 설화를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오가야(五伽耶) 편에 보면   아래와 같다.

가야국 구지봉


오가야(五伽耶)(아래는 직지프로젝트에서 삼국유사 해 한것입니다.)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해-끝

수로왕능


수로왕과 허 황후.
한반도 최남단 동남쪽 끝의 낙동강은 비옥하여 태초부터 이강을 젖줄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것은 당년하다.
설화에는 수로가 오기 전 까지는 지도자가 없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을마다 간(干)이라고 하는 추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귀간 등 아홉 추장이었고 이추장을 통틀어 구간(九干)이라고 했다.
추장들은 각기 자기 마을을 통솔한 정도이 었다.
기록에는 아홉 마을의 총인구가 7만 5천 명이었고 농경에 종사했다고 한다.

매년 3월 첫 뱀의 날을 계욕일이라고 하는데 이날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것으로 나온다.
 
당시 아홉 마을의 주민이 풍년을 비는 합동 제사였다.
어느 3월 아홉 마을 추장들이 제사 지낼때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불다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구지봉에 구름안개가 감싸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사적 자료로 보는 이야기는 당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과 모인 사람들이 이삼백명이었다고 하며 이들이 구지봉가까이 갔을때  "이 곳에 누가 있는가" 라는 목소리가 났었고, 모인자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있다." 고   구간들이 답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구지봉이다."
 " 잘 듣거라. 나는 황천(皇天)의 명령으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될것이다.
너희들은 산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구지가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
龜 何 龜 何  首 其 現 也  若 不 現 也  燔灼而喫也
위번역내용은 실제로 한문의 구음이나 뜻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에서  여러 사람이 땅을 구르면서 이 노래를 부르자 가락국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학술적인 언급으로는 ,
이 노래를 군주를 영접하는 노래 즉 영신군가(迎神君歌-임금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과거 사회에서 주술적,서사적, 노래와 춤이 엉킨 집단 무가(舞歌)로 보고 있다.

당시 전해지는 상황:
춤추고 노래하기 한참후에 하늘 한 가운데에서 자주빛 줄이 구지봉으로 길게 드리워졌고 붉은 보자기에 싸여 매달린 금합을 열어 금합 속의 둥근 황금 알 여섯 개를 보고 경배했다.
알은 아도간의 집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둔지 하룻만에  잘 생긴 6명의 사내 아이로 변했다 한다.

아이들은 십여 일만에 키가 9척으로 빠르게 자랏고 얼굴은 용 같고, 눈썹은 팔색을 뛰며 눈동자는 두개씩인 대인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중 금빛 알에서 나온자를 성을 김(金)이라 하고 가장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를 으뜸이란 뜻으로 수로(首露)라고 했다느데,이가 김바로 수로왕이다.

그후 구간들은 그들을 임금으로 모시면서 비로소 질서가 있는 국가로 탄생한다.
첫 번째 임금인 수로가 다스리는 나라를 대가야 또는 대가락이라 했고 6가야 중에 하나였으며 실제로 제일 강력했다고 보는데 근거는 확실치는 않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였다.

전하는 가야의 경계는 대가락을 이룬 여섯 가야국은 동으로 황산강, 서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에 이른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위에 올라 국가적인 성곽 및 왕궁등의 기본적인 규모를 갖추었다.

가야지붕은 이엉을 자르지 않은 풀로만든 지붕이었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석 자 이상 크게 하지 몯하게 했다고 하는걸 보면 잡다한 법이 많이 생긴것을 알수 있다.
이 모양은 현재 김해에 복원형태로 실물모양이 잘 만들어 저 있다.

금관성파사석탑

수로왕의 도성은 외성의 둘레가 1천5백 이며 그 내부엔 궁궐과 여러 관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등이 잘 정비 건축되었다.

야사에 보면 탈해와 수로왕의 변신술 재주 겨루기로 수로왕은 존경받는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개인대 대인의 변신술인지 전쟁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본다.

유천간은 왕명을 받고 망산도에서 바다를 관망하던중에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에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수로왕은 아유타국과 어떤방법으로든 통신을 한것으로 보인다.

아유타국 공주인 허(許) 황옥(黃玉) 은 16세의 나이로 하늘의 계시로 수로왕을 찾아 배필이 되고자 온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주는 신보, 조광 내외와 노예 등 20여 명을대동하고 왔다.
현재 까지도 인도에서 가야와 교류한 흔적이 기록으로 나온것은 없지만 분명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명이 허 황후이다.


이후 수로왕은 157세에 생을마쳤으며 구지봉 동쪽에 장사 지냈고 허 왕후가 처음 와서 내린 나루터가 있는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며  비단 치마를 예물로 주기위해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며, 허황후가 붉은 돛대를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허황후가 올때 가져온 붉은기운나는 돌탑을 볼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것이 불교 즉 남방불교와 연관있을것으로 생각되지만 삼국유사에서 불교에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기록에도 허황후가 불교적 의식을 한 기록이 없는것은 그 탑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렵다.

삼국유사 탑상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는 파사석탑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금관성 호계사에 있었던 파사석탑은 이읍성이 금관국일때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 24년 戊申: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고 한다.
공주가 부모의 명으로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하려 할때 水神이  노여움을 일으켜 바다가 거칠어저서 되돌아가니, 부왕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그대로 한바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할수 있었다한다.
탑은 사면이 5층으로  조각은 기묘하고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며 언듯 봐도 우리 나라 돌이 아닌것은 분명하다. 本草에 있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동혈족이다.
허씨는 허황후의 후손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모계(母系) 성(姓)씨이다.
시조 허왕후(許王后)께서는 왕자(王子) 열분을 두셨고 태자는 왕통을 이었으나
두 왕자느 이국에 출가했고 시조왕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母后)성을 계승케 했다고 한다.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후 김해에 남아있던 허씨는 김해허씨가 되었고 그 시조는 허염(許琰)이시다.
그때 하양으로 이주한 분은 하양허씨(河陽許氏)이고 그 시조는 호장(戶長)허강안(許康案)님 이라고한다.

공암양천(孔岩陽川)으로 이주한 분들은 양천허씨 이고 그 시조는 허선문(許宣文)님 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허씨들은 김해 김씨와 부계-모계로 연결된 가락의 왕손이다.
 
인천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라진 분적종(分籍宗)이며 시조는 고려 현종(顯宗)때 상서좌복야를 역임하신 이허겸(李許謙)이시다.
소성은 인천의 옛지명이다.

양천허씨 (陽川許氏)
시조는 가락국 김수로왕비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

태인허씨(泰仁許氏)
태인은 전북 정읍의 지명이며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의30세 손으로 고려태조 왕건의 부마 였으며 시산군에 봉해졌다.

하양허씨(河陽許氏)
지금의 대구옆 경북경산 하양에 있는 지명으로 시조 허강안(許康安)은수로왕비의 33세손이다.

인천허씨는 인천이씨로 보며, 인천이씨는(仁川李氏) 원래 신라시대 허씨성을 사용하던 허기(許寄)님 으로부터 출발해서 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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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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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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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재미로 하는 역사탐방 

김해역사 유적 벨트를 탐방한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가는것 보다는 도보로 하루를 할애 한다면 김해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봉황동을 시작으로 김해 읍성내 옹기종기 분포해 있는 유적 ,박물관,가상모형복원품,성루,등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가야국은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후학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부족 국가의 형태의 소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역사가 3국시대로 국한하는 내용을 수정한다면 그 현장에 가야 제국의 모습이뚜렸이 서있음을 알수 있다.

실제로 역사의 유물과 그 규모와 병마 제구의 질로 볼때 신라보다 우세한부분도 있고 대등한 국가라고 생각하며 찬란한 철기 문화는 신라로 일부 넘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국 말기에  신라의 외교로 고구려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개입때문에 사라진 제국 가야는 이제라도 우리는 역사에서 사국시대로 당당히 말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고령으로 부터 복천동에서 다시 김해로 오면서 역사가 쓰여진 미스테리에 휘말리고있다.

강력한 제국 가야가 왜 3국시대 언저리에서 조금 언급되고 있을뿐인가...
가야가 멸망하면서 우수한 인력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된 흔적은 많다.
또 그 기능이 신라에 전수된 흔적도 많다.
더 이상한것은  동이족의 지표인 갑골의 원류는 발해이고 그 흔적은  김해지역에서 충분히 발굴되었다.
발해거주부근에 집중된 갑골문자가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 분포 하는가에 관심이간다 .

참고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글에서는 발해연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는 최고 시기가
BC 3500~BC 3000년것이며 이는 중국 최고로 주장하는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 더 빠르다고 한다.

가야역사 베일의 뒤에는 혹시 제국의 역사가 있을것인가.
패총은A.D 1-5 세기에 형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미로 하는 역사 매니어는 틀에맞는 역사가 가공되길 즐거워 하면서 잠시 생각해본다.

"금관가야"


김해 봉황동 유적은 경남 김해시
봉황동(발굴당시 김해읍 회현리(會峴里))에 있는 유적으로서 패총유적이다.
발굴된 조개더미에서 수많은 유적이 나옴으로서 김해패총(金海貝塚)으로 불리고 있다.

"금관가야"


"금관가야"


최초 발굴은 1907년(융희1년) 동양 사학자인 교토제국대학교수인 이마니시(今西龍)가 1920년과 1934~1935년에 걸쳐 매장지를 조사 발굴하면서 조개더미유적임이 드러난곳이다.(위키백과 부분인용)

2001년부터 김해시에서 경남발전연구원을 통해 실시해 온 봉황동유적지에서는 항만접안시설이 존재할 개연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며 가야국의 배를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금관가야"



"금관가야"



"금관가야"



현재 김해시가 금관가야국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해상교역국임을 암시하는 굴립주건물지가 다량 출토되었다.

봉황동 유적지와 대성동 고분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을 둘어본다면 유물들과 역사적 사료를 파악할 수 있다.

봉황동의 발굴품들은 붉은 토기(赤色土器)·회색 토기·신라 토기의 파편과 철부(鐵斧)·철도자(鐵刀子, 쇠 손칼) 및 특히 왕망 시대의 화천(貨泉) 등도 발견되어 철기 시대의 패총임이 증명된곳이다.

그리고 상식석관(箱式石棺)·옹관(甕棺)·세형동검(細形銅劍)·마제석촉(磨製石鏃) 등과 금석 병용기 말부터 ~ 삼국 고분기(三國古墳期)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는 5가야조를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성산가야(星山伽耶),소가야(小伽耶),금관가야(金官伽耶),비화가야(非火伽耶)라고 하는데 김해지역은 금관가야 지역이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금관국,아시라국(阿尸良國),대가야국(大加耶國) 으로 적혀있다.

이하 <출처:김해시청>

김해 봉황동유적지는 봉황대라고 불리는 구릉지와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생산유적으로서,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 패총과 합쳐진 이름이다.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仇衡王 [ 구형왕 ]
금관 가야의 마지막 임금. 겸지왕(鉗知王)의 아들. 23대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9(532)년 신라(新羅)의 공격(攻擊)을 받고 항복(降伏)하였음. 법흥왕(法興王)에게서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야국(伽倻國)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음

가야국탐방바로가기-1: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Posted by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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