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금정산 금샘의 미스테리

 

금샘금샘

 

금정산을 오르곤 하는데 가끔은 금샘 코스를 다닙니다.

그때마다 금샘을 보지만 금샘설화나 역사적인 이야기는 배제하고 ,
상식적으로 볼 때 사실 미스테리에 가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술적으로는 바위에 이런 샘이 생기는 경우들을 설명하고 있지만 쉽게 납득이 가지는 않는게 사실입니다.


금샘을 보지 못한분들을 위해서 금샘을 동영상으로 찍었습니다.

사진은 많지만 실제로 가보지 않은분들은 사진만 보고는 실감이 안날것입니다.
금정산 고당봉에서 약300M정도 아래 바위봉군중에서  벼랑쪽에 솟아오른 한 바위위에 오묘한 샘이 있습니다.

금정산을 관리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심한 가뭄때 물이 마르면 새벽일찍 물을 갖다 붓는다고도 하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보진 못했지만 만약 그렇다면 잘 하는 일이기 때문이고요..

그 옛날 기록에 있는 내용을 볼 때 범어사가 창건되기 이전부터 이 샘이 있었고.
그래서 범어사 창건에 얽힌 설화나 기록이 있으며, 부산의 진산 금정산에만 있는 타지에서 보기드문 곳입니다. 
 

동영상으로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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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의 고장 고령박물관과 지산리 고분 탐방 
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탐방. 

경북고령군 고령읍 대가야로 1203 지산리460
전화 054-950-6071~3

가야국은 어떤나라인가?

가야국의 시조,수도,존재기간(加耶國의 始祖와 首都)

562년까지 낙동강을 끼고 그 서안 지역에 있던 여러 소규모 정치세력이나 작은 국가형태의 정치세력들을 지칭해서 가야국 이라고 합니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잇습니다.
각 표기들이 지니는 의미는 한자어대로만 풀이해서는 안될것이며 차이 또한 확실히 모르지만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인 삼국지에 구야국으로 기록된것이 적용되는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가라(加羅)로 되어 있고 중국과의 공식적인 통교사실을 기록한 남제서에 加羅로 표기된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당시 사용되던 공식 국명은 ‘가야’가 아니라 ‘가라’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에는 가야란 명칭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가야(함안),고녕가야(함녕),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삼국유사는 주로 가야(伽耶)로, 삼국사기는 가야(加耶) 또는 가라(加羅)로 쓰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라 가야(加耶)로 통일해서 사용하기로 하는 추세입니다.

가야에 관한 역사책은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인물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원본은 없으며 이 책에서 발췌해서 정리한것으로 알려진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는 일찍이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발달해서 풍부한 철을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한것입니다.

특히 이 시대 가야 문화는 일본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납니다.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당시 가야의 국력과 왕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게됩니다.

안타갑게도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과 다르게 많은 가야가 하나로 통일되지못하고 지역별로 분립된 상태로 지속하다가 멸망하게됩니다.

가야 소국들 전체가 신라와 백제로 모두 흡수되거나 멸망 됩니다.

대가야역사관,왕릉전시관경북고령군 고령읍 대가야로 1203 지산리460 전화 054-950-6071~3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지역의 정치세력들은 각각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로 지역 연맹체로 지속되지만 통일 국가로 결합하지못한것입니다.

오직 대가야는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 까지 가장 강력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고대국가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세력으로 발전했다고 알려집니다.



대가야(大加耶)는 어떤나라인가?

경 북 고령을 도읍으로 하고 있던 나라로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시조 이진아시왕에서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하는것입니다.

현재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권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자료로 봅니다.
또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하는데 이는 3세기 중엽까지는 김해의 금관국이 가장 강력했던터라 이를 대가야가 계승했다는 정통성을 주장 하는것으로도 생각됩니다.

5세기 후반에 대가야는 현재의 고령, 합천,거창,함양,남원,하동,구례, 진안 등 까지를 영토로 하는 큰 나라로 발전한 것입니다.

중국의 남제서 동이전 가라국조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고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대가야는 중국과 교류를 하는 국가적인 형태의 세력이라는것을 알 수있습니다.

481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에 침입했을 때 대가야가 백제군과 함께 출병해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내용도잇습니다.
그러나 가야권 전체를 통합하지는 못하고 
562년 멸망하게됩니다.

가야국 지도4국시대 대가야 지도

대가야대가야

지산리고분지산리고분


◙.대가야 원문

고대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가야국(加耶國)이 언급되지만 ,많은 가야국 중에서 시조(始祖)가 명확히 이름으로  기록된 가야국은 금관가야(金官加耶),고령가야(高靈加耶) 두개 뿐이다.

현재 행정구역 고령군은 대가야국의 본역지이다.
시조 이진아시왕(다른이름:내진주지) 을 시작으로 도설지왕까지 모두 16세 520년의 역사를 가진 강력한 남부지역의 일국이다.
진흥왕이 침공하여 멸망시키기까지 가야국으로서는 신라를 위태롭게하며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가장 강력한 가야국이었다.

대가야는 2현의 지방으로 구성되고 현재행정구역명 합천군 야로면은 야로현이었으며  그때 적화현인이었고,
신부현은 원래는 가시혜현인데 경덕왕 때 지명을 고친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야로는 지금 그대로임으로 정확히 알수 있지만 신부현은 사학자들의 엇갈린 해석은 있어도 현재지역을 정확히 추정할수 없는 형편이다.

◙.금관가야.
김해의 작은수도는 옛날의 금관국(혹은 가락국,가야라고함)이다. 

시조는 수로왕이며 10대 구해왕이 신라 법흥왕(19년,532년)에게 백성을 데리고 항복해서 신라와 병합됨.
이후 금관가야는 금관군으로 개칭되었다.
문무왕 20년에는 소수도로 격상되고  경덕왕 때는 김해경으로 개칭되며 이후 지금의 금주로 불린다.

고녕가야.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이다 라고 기록된바.
이를 신라가 정복해서 고동람군(또는 고릉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했다.
지금의 행정구역 명칭은 함녕군이다.
당시 3현으로 구성된 고녕가야이었는데,
@가해현을 가선현으로, 가해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고 이후 가은현임.
@관현(또는 관문현)을 관산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함, 이후 문경현임.
@호측현은 호계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하고 이후 그대로 사용함.

.화왕군
비자화군(비사벌)은 화왕군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에 주로 바꾸고 이름을 하주(下州)라 했는데,
경덕왕 26년(565년)에 주를 철폐하고 개칭하며 지금의 창녕군이다.
추량화현(삼량화)은 현효현으로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현풍현이며 현재행정구역 현풍임.

.고성군

고성군은 고자군(古自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칭되었고 이후 그대로 쓰며 3현의 행정구역이었다.
문화량현(蚊火良縣)은 지금의 어디인지 모른다.

사수현은 본래 사물현이었고 ,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사주(泗州)이다.
.상선현은 본래 일선현이었고 ,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영선현이다.
.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을 일으켜 아시라국(阿尸良國)(阿那加耶)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군으로 만들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함. 이후 그대로 쓴다. 2현의 행정구역이었다.
. 현무현은 본래 소삼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함.이후 소삼부곡이다.
.의녕현은 본래 장함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그대로 쓴다.

.성산군은 본래 일리군(一利郡)(里山郡)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가리현임. 4현의 행정구역.
.수동현은 본래 사동화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짐역 미상임.
.계자현은 본래 대목현인데 경덕돵 때 개칭 이후 약목현임
.신안현은 본래 본피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경산부임
.도산현은 본래 적산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지역 미상임.

아라가야("羅"를 "耶"로 쓰기도 함. 지금의 함안),
고령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지금의 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혹은 벽진이라고도 함),
소가야(지금의 고성).

주: "태조 천복 5년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김해부가 되었다),
둘째 고령(가리현이 되었다),
셋째 비화(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의 잘못인 듯 싶다),
넷째 아라 가야
다섯째 성산(혹은 벽진가야)이다.

가락기에서 ,
자색 끈 한 가닥이 하늘에서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내렸는데, 5개는 각 읍으로 돌아가고 ,
하나는 이 성에 있게 되었다고 했고.
그중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5개는 각기 5가야의 군주가 되었다고 했는데,

금관가야는 이 5의 숫자에 계산하지 않은 것 이지요.
그런데 가끔 사해에서 금관가야 까지 그 숫자에 더해서 넣고 창녕가야 까지 기록한것은 실수 한 것으로 봄.




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지산리고분군


■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이란?

지산동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분포하는 거대한 무덤들의 집합체를 말합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읍을 감싸는 주산성(主山城)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과 가지 능선에 걸쳐 넓게 퍼져 있습니다. 주산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 위,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크고 작은 고분 수백 기가 남아있습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뿐만 아니라 가야지역 전체에서도 가장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써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에 대한 첫 발굴조사는 1906년 세키노(關野貞)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로이타(黑板勝美), 이마니시(今西龍), 사이토(齊忠) 등의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 1976년 고령군 공보실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 정화작업 이후 외형이 확실하고 비교적 큰 고분에 한해 일련번호를 매겼습니다.
이 가운데 44·45호분은 1977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의 합동발굴조사단이 발굴, 조사를 했고, 32·35호분은 1978년에 계명대학교에서 조사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이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인 44분과 45호분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묘제상 중요한 자료인 이들 순장묘가 발굴됨으로써 한국고대사에서 문헌상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순장 기록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44호분에서는 30여 명 이상의 순장자가 묻혀 있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의 주된 무덤 형식은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입니다. 이 고분군의 무덤들 가운데 3기만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입니다. 이들 고분군에서는 '고령식', '대가야식'으로 불리는 여러 종류의 토기류와 철제의 이기(利器), 마구류, 고령의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금동제 관장식, 금은장신구, 옥류, 청동제 거울, 청동합(靑銅盒) 등 최고급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여지는 등잔도 출토되어 대가야가 이들 국가와 대외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의 기록으로 이 고분군은 대체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산동고분군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32호 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입니다. 이관은 관대의 앞면에 반월모양의 장식물을 세워 두었는데, 그 세움장식에는 꽃가지 모양의 장식이 좌우로 각각 하나씩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후꾸이현 니혼마쯔야마 고분에서 이 32호분 출토 금동관과 같은 계보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금동관이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요컨대 대가야와 일본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형의 금동관들은 5세기 무렵에 두 나라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아주 귀중한 유물인 것입니다.

■  지산동 44호분은?

지산동 44호분은 주산이 경사져 내리는 끝 부분의 비교적 넓고 평평한 땅에 걸쳐 있어 다른 고분들보다 더욱 우뚝 솟아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고분의 아래쪽은 급경사여서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위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고 완만하게 경사가 져 있습니다. 45호분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지점입니다.
이 고분은 가운데에 으뜸돌방〔主石室〕1기와 딸린돌방〔副葬石室〕2기의 큰 돌방〔石室〕을 만들고, 주위에 작은 돌덧널〔石槨〕32기를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다음 타원형 둘레돌〔護石〕로 이들 모두를 둘러싼 다곽분(多槨墳)입니다. 순장자는 32기의 작은 돌덧널에 순장되어 있고, 그 외에 으뜸돌방과 딸린 돌방에도 1명 이상씩 묻혀있어 적어도 36명 이상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도굴로 인해 매장 당시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뚜껑접시, 그릇받침 등의 토기류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딸린돌방인 남쪽 돌방에는 대형그릇받침 18개가 집중적으로 나왔습니다. 이밖에 투구를 비롯한 철제무기류, 말띠드리개, 금제귀걸이, 청동그릇과 다양한 종류의 옥 제품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이는 등잔 한 점과 일본 오키나와제도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왔습니다. 이 유물들은 대가야가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기록으로 볼 때 이 고분은 5세기 중,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  지산동 45호분은?

45호분은 주산이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 뻗기 시작하는 돌출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44호분에서 산 위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 고분은 가운데에 두 개의 큰 돌방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외곽에 11개의 돌덧널을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한 다곽식 무덤입니다. 돌덧널 외곽에는 둘레돌을 둘렀습니다. 으뜸돌방은 암반을 깊게 파고 네 벽을 큼직한 깬돌〔割石〕로 고르게 쌓았는데, 길이와 너비의 비가 4.5 : 1인 좁고 긴 구덩식돌방입니다. 이런 모양의 돌방은 고령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가야양식의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45호분의 규모는 긴 지름이 28.2m, 짧은 지름이 25.7m, 뚜껑돌〔蓋石〕위에서의 높이가 2.8m입니다. 도굴당했기 때문에 껴묻거리의 상당수가 없어졌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유물이 꽤 있었습니다. 굽다리접시 등의 각종 토기류를 비롯하여 금동관식(金銅冠飾), 금제귀걸이, 말안장, 재갈, 말띠꾸미개, 은으로 장식된 고리손잡이큰칼의 손잡이부분, 쇠창, 각종 청동제품 등이 으뜸돌방에서 나왔습니다.
이 무덤도 역시 순장묘로, 11기의 돌덧널 외에 으뜸돌방에 2명 이상, 딸린돌방에 1명 이상의 순장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금귀걸이와 목걸이를 걸고 있어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순장했으리라고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이 무덤은 대략 5세기 중, 후반경에 만들어졌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산동 45호분지산동 45호분 금동관식(金銅冠飾)


■  지산동 32호분은?

32호분은 큰 무덤들이 자리하는 주산의 주능선이 급경사로 내려와 넓고 평평한 형상을 이루는 구릉 정상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32∼35호분으로 이름 붙여진 4기의 고분이 300여 평의 면적 안에 서로 2∼3m 간격을 두고 모여 있습니다.
이 고분은 묘역 가운데에 돌방 1기와 돌덧널 1기를 나란히 배치한 다곽분으로, 주위에 길이 11.2m의 타원형으로 둘레돌을 돌려 놓았습니다. 봉토는 긴지름이 13.1m, 짧은지름이 12.6m, 높이는 뚜껑돌 윗면에서부터 1.5m입니다. 돌방은 두껍고 납작한 직사각형의 깬돌로 네 벽을 엇물리게 쌓았으며, 넓고 편평한 깬돌 10매로 뚜껑돌을 덮었습니다.
32호분에서는 뚜껑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바리형그릇받침, 큰 합 안에 작은 합들이 들어있는 모자합(母子盒) 등의 토기류와 갑옷과 투구, 고리손잡이큰칼, 발걸이, 청동방울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나뭇가지모양의 세움장식을 한 금동관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돌방 가운데에 안치된 나무곽 속에 동북방향으로 눕혀 있었으며, 껴묻거리의 성격으로 보아 남성으로 생각됩니다. 주인공의 발치쪽 껴묻거리 속에는 또 한사람의 피장자가 있었는데 아마도 순장된 사람일 것입니다. 순장자는 돌방에 1명, 순장 돌덧널에 1명으로 총 2명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고분은 5세기 중반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고령박물관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이상 포스팅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공부하며 온라인에서 자료를 모아 편집한것이며 학술적인 신뢰도가 없음으로 인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여행,관광,지역소개] - 가락국-가야국-구야국

[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 가야국탐방(2) - 기록으로 보는 금관가야

[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주는 지산리 고분군

[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 가야국탐방(1) - 금관가야

[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주는 지산리 고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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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실의 유작들을 보면서.

장영실과학자 장영실


오랫만에 동래 내성 북문쪽을 나들이 했는데 전에 없던 구조물들이 북문앞에 자리잡고 있군요.
조선시대 뛰어난 과학자 장영실이 이고장 사람이기 때문에 동래구청에서 유작과 관련 과학적인 업적들을 재현해서 교육용으로 이용할수 있도록 잘 만들어 놓았습니다.

다아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 과학적인 이론이 뒷바침 되어야 만들수 있는것들이기 때문에 유심 관찰하며 한참을 구경했습니다.

둘러보는중에 찍은 사진들을 올려 봅니다.


과학자 장영실

측우기입니다.

측우기-장영실과학자 장영실-측우기

측우기-장영실측우기-장영실


수표기입니다.
즉 장마때에 물이 얼마나 높이 올라오는가를 측정한것입니다.

수표 장영실



장영실



일성정시의-장영실

신법지평일구-장영실

앙부일구



 

해시계


 

현주일구-장영실

일성정시의-장영실

현주일구-장영실

천상열차분야지도천상열차분야지도 국보제 228호



혼천의혼천의


혼천시계 혼천의



신법지평일구

장영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천상열차분야지도

장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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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아크메즈 2009.11.30 23:44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장영실이 부산사람이였군요. 이고장에서 살은지가 5년째네요. 아직도 지리가 낮설지만 영실이형님한번 뵈러가봐야겠습니다.



구포왜성(龜浦倭城).

왜성은 왜국이 지은 성이란 말이며 1592년 선조시대  임진왜란이 났을 때 당시 조선을 침공한 왜군들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공격을 위해서 안전한 교두보를 설치한 것이며 양산과 김해 부산을 거점으로  조선에 안전한 근거지로 활용되고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한 석성이다.

구포 왜성구포 왜성

  주로 그릉지를 앞에두고 얕은 동산을 확보하여 그 상부에 축조하는데 우리나라의 담벼락같은 모습으로 지그자그로 입구를 휘돌아 들어올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든 것을 볼 수 있다.


왜성은 임진왜란 및 정유재란에 걸처 축조한 성이 그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으며,동남해안 전반에 걸처서 약 30여개가 현존한다.

이 성은 임진왜란때 처음 이곳을 점유한 왜장(倭將)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 일명:こばやかわ たかかげ )와 다찌바나(立花宗茂 일명:たちばな むねしげ)들이 김해의 죽도성(竹島城, 金海城)의 지성(支城)

이 구포 왜성은 현재의 낙동강 구포대교에서 화명동 쪽에 위하고 있는데  산의 높이는 대략 76m 표고로 나오는 언덕 정도에 불과한 정도의 작은 규모이다.

울산으로부터 순천까지 이어지는 해안 벨트의 중간부근인 이 구포왜성은 낙동강을 중심으로 내륙 작전의 요충을 담당하려 한곳으로서 마주보는 김해왜성(죽도왜성),상부로 호포왜성과 함께 전략적인 위치에 있던 성이었다.

구포왜성구포 왜성


지금은 성상에는 아무것도 없고 성곽만 남아있고, 일반인의 사유지와 국유지가 섞인 경작지와 함께 성벽만은 거의 원형으로 남아 있다.

1596년에 강화회담으로 잠시 철수했다가 1598년 정유재란때 다시 들어와서 주둔하다가
그 해 5월에 이 왜성을 폐기하고 서생포 왜성으로 이동 합류 했다고 한다. 

왜군이 우리땅을 침탈한 흔적이지만 이 구포왜성은 부산광역시 북구 구포동에 위치한 기념물 제 6호로 지정되고 있다.

가는 교통은 지하철만 설명한다면 지하철 3호선덕천역에서 하차하여 10번 출구로 나와서 구룡사 쪽으로 가도 되고 4호선 숙등역내려 6번출구로 나와서 낙동탕 쪽으로 가도 되며  4호선 덕천역에서 내려12번 출구로 나와서 락천사쪽이나 구룡사족으로 오르면 됩니다. 거리는 도보  500~ 1Km 정도 된다.

북구 문화빙상센터를 거처서 간다면 예쁜 육교를 이용해서 남해고속도로를 황단하여 구룡사로 갈 수 있다.

구포 왜성구포 왜성

 

구포 왜성구포 왜성

 

구룡사구룡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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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북구 덕천2동 | 구포왜성(龜浦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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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3.13 12:56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구포왜성(龜浦倭城).


    왜성은 왜국이 지은 성이란 말이며 1592년 선조시대 임진왜란이 났을 때 당시 조선을 침공한 왜군들이 남해안을 중심으로 장기적인 공격을 위해서 안전한 교두보를 설치한 것이며 양산과 김해 부산을 거점으로 조선에 안전한 근거지로 활용되고 조선군의 공격에 대비하기 위해 축조한 석성이다.


서기(西紀),세기,BC,AD

역사이야기 2018.05.02 19:31


서기(西紀)는 서력기원(西曆紀元)의 약어로서 예수의 탄생을 기점으로 이를 기원(紀元)으로 삼고 그해를 원녕으로 계산하는 서양의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용해 온 책력 기록 방식이다.


현재는 전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으며 그레고리력의 1년을 기원으로 하는 시작하는 해로 삼고 있다.


기독교 문화권에서 사용을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그 약어도 영어로 Anno Domini (주의 해(年))를 첫자를 취해서 AD로 표기한다.


즉 예수가 탄생한 해를 기원으로 하여 이후를 AD 이전을 Before Christ (예수 이전)줄여서 BC로 표기 사용한다.


기원후 AD(Anno Domini -주의 해(年))나 기원전 BC(Before Christ-예수 이전에)이 처음에는 특정 종교의 책력이지만 전세계가 역사 연대를 표시 할 때 공통으로 사용 하면서 이제는 특정 종교적인 책력으로 인식 하기 보다는 보편적인 책력으로 인식 사용 되고 있기 때문에 굳이 주의 해 라는 식으로 생각하지는 않으며 보편적인 서기 즉 기원후(기원 원년 이후)로 사용하고 있다.


사전적 유의어로서  서력기원, 에이디, 주후가 있다.


그리고 예수가 태어난 해를 기점으로 한다는 내용이기는 하지만,
실제로 예수가 태어난 시기가 역사적으로 이 때와 혼선이 초래 될수 도 있음으로 종교적인 날자로 보지 않고 보편적 연호의 기록 방법으로 보는 것이 타당 하다고 생각한다.


아예 BC나 AD를 대체할 연호를 고안 하려는 시도와 타 종교의 연호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지만, 글로벌 역사 시기를 공통적으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전 세계가 이미 널리 사용 중인 BC나 AD를 사용 하는것이 많은 융통성 면에서 득이 되기 때문에 우리도 우리 고유의 연호 보다는 서력기원을 사용하는 편이 좋다고 생각한다.


이미 특정 종교와 밀접한 연호이기는 하지만 이제는 종교와 상관없는 단순한 연대표기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달리 생각하지 않는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서기를 기준으로 100년씩 나누어 구분하는 
세기(century) 또한 보편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역사시기 표현방법으로서 이미 통일된 표기로서 고착 되어 있기 때문에 대체를 논의하는것은 불필요 하다는 생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웃 일본처럼 자기나라 고유의 연호와 병행 사용하는 나라도 있지만 이를 그나라의 정체성과 연관 시킬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다.

.

서기(西紀)와 세기와 BC,AD서기(西紀)와 세기와 BC,AD



역사를 공부 할 때 자주 쓰지만 가끔은 헷갈리기도 하는 단순한 약칭을 알아봅니다.


세기(century)는 그리스도 탄생의 해를 원년으로 100년을 1기로 하여 연대를 나누어 세는것이다.

다만 1세기는 원년 즉 AD1년부터 시작해야 하며 AD100년 까지를 말하는데 이후 계속해서 100년 단위로 101년 201년 부터 2세기 3세기 이런식으로 부른다.


다만 AD1세기 
AD2세기 하지 않고 그냥 1세기 2세기 라고 한다.


서력기원 이전 즉 예수가 태어나기이전의 해는 BC로 표기하며 BC100년부터 BC1년까지가 BC1세기가 되지요.


BC2세기는 BC200년부터BC 101년까지이고요.


원년을 기준으로 과거로 멀어지는 마이너스는 BC이고 현재에 가까워지는 플러스는 AD이겠습니다. 

BC2400년부터 BC2301년까지 BC24세기네요.

BC196년은 BC2세기 이겠습니다.


AD 2세기는 그냥 2세기 라고 하며 101년부터 200년까지입니다.
다만 역사에서 인식을 편하게 하기위해서 AD라는 전치표시를 할 필요가 있기도 합니다.


AD1499년은 AD15세기이며 그냥 15세기라고 표시하며 년대로는  AD1401년부터 AD1500년까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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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재현 朝鮮通信使

부산 광복동 거리를 행렬하는 조선통신사 재현 축제에 참가한 일본 행렬들을 봅니다.

많은 참가자들이 있었으며 아래는 시모노세키 팀의 사진입니다.
약400년전 우리의 선조들의 늠름한 행차가 그들의 일본열도를 종단할때 지나가는 고을마다 열열이 환영 하던 모습들 중 일부를 재연하는 것입니다. 

광복동 거리에 지나가는 일본팀들의 모습에서 최근 일본의 한국에대한 소행이 생각나긴 하지만 도시간 민간 문화 교류의 한 장으로서 정치적 또는 과거사를 떠나서 좋은 행사입니다 .

참가한 많은 일본팀들은 열심이 그들의 문화를 선보이며 행진했고 부산 시민들도 박수로 화답하는 모습을 보면서 한일 관계가 좀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 가능하리란 생각을 합니다.


앞으로 더 많은 일본의 도시들의 참가로서  문화 교류가 이루어지고 이 축제가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조선 통신사는 유네스코 문화 유산으로 등재시키기 위해서 노력중이며 이렇게 대단한 외교 사절단이 조선에서 일본으로 행차했다는것은 볼수록 대단했던 것으로 생각되며 그 규모를 상상해 봅니다.

평화를 위한 한일간 통신은 무려 12차례나 치뤄젔으며 이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볼 때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부산시와 시모노세키(下関)시는 자매 도시이며 시모노세키에서도 매년 8월 부산 자매 도시 공원과 유메 광장 구간에서 조신통신사 행사를 펼치며 행렬의 정사(正使)역할은 부산시에서 참가하며 시민 참가자들도 함께 갑니다.
부산의 취타대와 정사,부사, 종사관등 고증을 거친행사를 치루고 있습니다.]

조선통신사 사진조선통신사 시모노세키

<시모노세키 馬関奇兵隊(바칸키헤이타이) 下関のよさこいチーム(시모노세키의 요사코이팀)
조선통신사 환영 행렬 - 일본 시모노세끼팀의 멋진 거리 퍼포먼스

조선통신사 시모노세키 퍼포먼스조선통신사 시모노세키팀

과거에 조선통신사가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 주민들이 길거리에서 환영행사를 했던 그 때를 복원해서 공연하는것입니다. 이 사진은 시모노세끼 주민들이 재현한 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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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인문 교육 제도


학교 형태 교육기관 교육과목
관립학교 성균관
고등교육

중앙(서울)
1397년 설치된
국가 최고 교육기관
생원:100명, 진사:100명 합 200명

대학,중용,논어,맹자,서경,시경,주역,예기,춘추,서법
사학
중등교육

중앙(서울)
1411년 설치됨/ 4부학당
중학, 동학, 서학, 남학 ,
정원 100명 내외

소학,효경,사서,오경,제사,문가예집
종학 중앙(서울)
1428년 설치됨/ 종친부
경서,역사,예서,도의
향교
중등교육

지방에설치된 유일한 관학기관.
전국 모든 군, 현에 설치됨.
지방부,군단위의 지방유생,성균관의하급관리

부,목,군,현에 각각 하나씩.
부목, 대도호부 : 90명,
도호부 : 70명,
군 : 50명,
현 : 30명

훈도 파견, 지방교화/유생교육/ 기술관양성/과거시험대비한시설 강습소

소학,사서,삼경,근사록,여씨향악,정속,이륜행실
사립학교 서원

지방
1542년설치 최초-백운서원.
조선후기엔대원군이 서원철폐령이 내리고 쇠퇴함

16c 이후에는 과거보다 순수 학문연구를 주로함

소학,대학,논어,맹자,중용,심경,통감,근사록,예기,춘추좌전
서당
초등교육

지방
지방양반가중심으로 교육이 행해짐.
조선후기엔 평민자제도 교육받은 초등교육의 기본

향교에 입학하지 못한 선비, 평민의 자제 - 8~16세,

천자문,명심보감,동몽선습,이희원람,격몽요결,소학,동자습,동자례


서양식 교육 방향과는 조금 다르며 도덕을 기본으로 하는 인의 예지를 중점적으로 구성된점이 색다르지만,
나름대로 잘 짜여진 형태라고 생각된다.

어쩌면 물질최선으로 강요되는 현대 사회에서 본다면 다소 뒤떨어지는 교육 내용으로도 볼수 있으나
기회가 주어진다면 이 과정 전부를 이수해 보고싶을 만큼 유학에 대한 전부를 막라한다고 보여 지는군요.

명륜당조선시대 인문 교육 제도


아래의 사진들은 나름대로 교육제도의 체계가잡힌 때의 교과서 들의 사진이다.

조선시대교육자료 맹자조선시대교육자료 맹자

성균관의 구성
1.명륜당 - 유학 강의
2.문묘 - 공자 모시는곳
3.양재 - 기숙사
4.존경각 - 도서관
5.비천당 - 과거 시험 보는 장소

조선시대 기술 교육 제도

1.형조(잡과) 2.도화서(취재) 3,호조(취재) 4,전의감(잡과) 5,관상감(잡과) 6,사역원 7,소격서

중앙은 성균관,사학(4부학당)에서 교육 하며 지방은 서원(사학)에서 굥육했다.

조선시대 무과 교육 제도

무술과를 별도로 두어 군사기술을 교육했으며 경당, 화랑, 강예제(7재), 원산학사, 신흥무관학교를 운영했다.

교육과목은 무예, 경서, 병서를 주로하며 유교경전도 포함 됨으로서 권력 기관의 문-무 양 반열을 균형 있게 확립하고 있다.

응시대상: 서얼,중인
시험구분(3등급):초시, 복시, 전시 ->홍패가 수여됨.

해당관리: 갑 - 종7품 , 을 - 종8품 , 병 - 종9품 으로서 과거시험으로 최종 33인을 선발한다.


조선시대교육자료 서당조선시대 교육기관 서당


조선시대교육자료 예기조선시대 교과서 예기


조선시대교육자료 주역조선시대 교과서 주역


조선시대교육자료 통감






조선시대교육자료 시전조선시대 교과서 시전





[역사이야기/역사,시사,설화,] - 지방국립학교-명륜당
[역사이야기] - 교육역사 자료-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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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왕조(高麗王朝)계보및 왕위계승 도표


고려왕조(高麗王朝)는 태조왕건이 918년 건국하여 1392년 조선 왕조에게 망하고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까지 474년간 한반도를 국토로 하며 이 지역을 장악하고 지배하였던 왕국이다.


왕조 이전에 신라 말기 송악 지방 호족 왕건이 나라를 일으킨후 919년에 지명을 송악에서 개경(開京:개성)으로 변경하고 수도로 했다.
이후 936년 한반도를 재통일 했다.


수도 개경과 외항 벽란도를 중심으로 중국, 일본, 아라비아, 페르시아 등과의 외국무역도 한 개방국이었으며 송나라와 우호관계에 있었고,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등의 침공을 받았으나 격퇴하여 국력도 강했다.

12세기에 들어 무신정변이 일어났고 최충헌, 최우등의 이른마 최씨 무신국가가 되었으며 이 시기 반정부 세력이 등장했다.


13세기들어서며 약 30여년동안 원나라(몽골)의 침략으로 결국에는 지배를 당하게 되어 국력이 쇠퇴하다가 결국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을 기점으로 고려왕조는 멸망했다.


조선을 있게한 직전국가로서 역사적인 연장선상에 놓인 한반도의 통일국가 고려왕조의 계보와 왕위계승도를 보여드립니다.
    



태조 혜종 정종 광종 경종 성종 목종 현종 덕종 정종 문종 순종 선종 헌종 숙종 예종 인종 의종 명종 신종 희종 강종 고종 원종 영종 원종(복위) 충렬왕 충선왕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역사이야기] - 조선왕조 왕위계보와 도표

[뉴스종합/뉴스일반] - 사라저 가는 세계의 전제군주제-왕정 국가

[여행,관광,지역소개] - 문무대왕 수중릉-대왕암

[유네스코-문화유산/한국문화유산] - 조선왕조 왕릉및 왕위 계보 사적번호

[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 가야국탐방(2) - 기록으로 보는 금관가야

[역사이야기/역사,시사,설화,] - 조선왕조 왕위표와 이성계의 건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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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5.11 19:5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비밀댓글입니다

  2.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4.05.21 10: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댓글감사합니다.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겠습니다.

  3. BlogIcon 뽀레 2015.03.26 12:4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감사합니다~

  4. 현호 2018.08.15 0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숙종은 문종의 세째아들입니다. 틀렸으니 수정해주세요.

  5. 현호 2018.08.15 04:25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숙종은 문종의 세째아들입니다. 틀렸으니 수정해주세요.



백제왕위(百濟王位)계보(系譜)및 계승도(繼承圖)


백제(百濟)는 기원전 18년에서 기원후 660년까지 한 반도 남서부에 자리잡고 이어갔던 한국의 고대 국가이며 삼국시대의  고구려, 신라와 함께 존재했던 한 국가로서 당시에 가야도 국가로 본다면 일부 겹치는 동시대에 존재했다고 해서 일부에서는 4국시대에 존재한것으로도 말 하기도 하며 남부여(南扶餘)로도 불린다.


왕성했던 근초고왕 때를 비릇해서 전라도 지역을 장악하고 북쪽으로는 고구려와 대립하며 한반도 남서부 전역을 장악한 강력한 때도 있었다.

백제의 건국역사는 설화로 알려진것 외에는 없으며 3개의 설화가 있으나 온조설화를 역사에 많이 인용하는 것으로 볼수 있다.


백제왕위(百濟王位)계보(系譜)및 계승도(繼承圖)백제왕위(百濟王位)계보(系譜)및 계승도(繼承圖)

[역사이야기] - 고려왕조(高麗王朝)계보및 왕위계승 도표

[역사이야기] - 조선왕조 왕위계보와 도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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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문화유산/한국문화유산] - 조선왕조 왕릉및 왕위 계보 사적번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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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모양뿔잔

가야문화의 진수를 본다-복천동고분


복천동고분 7호분에서 출토된 말모양뿔잔은 현재 우리가 보드라도 감탄할 만큼 추상적이기도하고 특이하게 만든 그때 그사람들의 작품이다.

그시절 5세기경이라면 언듯 생각하기는 형편없는 문화수준의 미개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생각할수도 있으나 출토된 유물들로 볼때 현대교육을 받고 전문적으로 만드는 어느 예술가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손색없는 우수한 작품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술잔을 만드는데 그냥 아무렇게나 만든게 아니고 당시 가장 중요한 교통수단인 말모양을 카피해서 만든것이다.

현대인들이 이렇게 만든다면 예를 들어서 페라리모양 술잔이나 BMW모양 술잔에 비교할 수도 있다.

 

The Ancients Cultural relic of KOREA

N0 7 Tumulus Bockcheon-dong BUSAN

5 Century ,한국의 고대문화유산,말모양뿔잔 5세기,복천동 제7고분 출토,韓国古代文化遺物,韩国古文化遗存


말모양뿔잔-5세기작품말모양뿔잔-5세기작품 가야문화의 진수를 본다-복천동고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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