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재현에서 한일우호라는 깃발을 보며 

부산에서 몇일째 열리고 있는 조선통신사 재현 축제에서 그 하이라이트인 행렬이 용두산공원에서 많은 부산시민과 일본에서 온 축제참가자들과 함께 식전행사를 마치고 날씨도 화창한 봄날 토요일 오후 종탑앞을 출발해서 광복동거리를 지나는 행렬은 말그대로 장관이었다. 

조선통신사 재현


정사,부사,종사관과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을 그당시대로 재현하는 이 행렬은 부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뜻깊고 큰 행사이다. 
지금도 이런행사를 하는데는 만만찮은 준비와 경비가 들고 번거로운데 약 400년전에 총400여명의 인원이 그 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행사를 무려 12번이나 했다는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웃나라와 평화를 누리자는 믿음을 전하고 선린우호를 모티브로하는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된것이며 때로는 속내를 감추고 때로는 과장하고 때로는 문화의 전달자로서 움직인 이 거대한 행렬은 우리조정은 우리대로 속셈이 정치적인 목표가 있었을것이고 일본은 일본대로 얻을게 있고 이용할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 많은 돈을 들여 긴 여정 동안 400여명의 우리 사절단을 극진히 안내하고 대접했으리란 생각이다. 


조선통신사 재현과 한일우호



그때 그 행렬이 끝난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열리는 이 큰 행사는 당시 일본을 지나던 길목인 곳곳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행사단을 보내고있다. 

정치적으로 일본과 우리와의 사이에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나 독도나 대마도의 영유권에대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문화행사로서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는 행사로 한국과 일본이 함께 광복동 거리에서 나팔불고 손 흔들며 행진한다. 

어쩌면 아이러니를 포함하는 미묘한 행사라고 생각할수있지만 그들나라의 길목에있었든 예술단이 춤을추며 통신사를 환영하는 퍼포먼스는 예사롭지않게 화려하며 일본인이 흔드는 한일선린우호라는 큰 깃발은 그저 보고 넘길수만은 없었으며 길거리에서 일본인의 행렬에 박수치는 시민들의 마음을 잠간 생각해 봤다. 

우리는 다시금 한류문화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출발하고 일본열도는 들끓는 환호로 우리의 통신사를 영접하며 우리의 이웃나라로서 조금은 어설플지 모르지만 이 귀한 역사적인 사실이 발전계승되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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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2)통신사와 당쟁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200여년간 총12회에 걸처서 한일 양국간의 평화를 위해서 일본에 파견된 대규모 정부 사절단이다.

 

국가간의 신의를 거듭확인하는 목적이며 부산을 출발한후의 모든경비를 일본막부가 부담하는 초청외교사절단이었다.


구성은 정사,부사,종사관의 삼사이하, 화원,의원,역관,악사등로 구성되었다.

조선수도 한양에서 출발해서 에도까지 순탄할 때 1년반정도 걸리는 긴 여정을 치루는 큰 행사이다.


조선통신사(2)통신사와 당쟁



일본땅에 상륙하게 되면 통신사가 머무는 지역마다 대 환영행사가 일어나고 조선의 관리인 선비들로부터 글씨하나 받으려고 했으며 필담도 주고받으면서 지나가는 고을마다 문화교류가 일어났든 것이다.

통신이란 신의를 기반으로 양국이 전쟁을 방지하고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하나의 국가간 행사이다.


그 오랜세월동안 통신사는 우여 곡절이 있었으며 대표적으로는 1510년 중종 5년에 삼포왜란이 발생해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사절 왕래가 중지되다가 선조시대에 들어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줄기찬 요청으로 조정은 다시 파견한다.

조선 조정은 1590년 교토로 떠나는 통신사에게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속내를 알아볼 임무를 부여해서 보낸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의도가 있는지 탐지할 목적을 주어서 파견한 정치적인 특사였든 것이다. 

우리조정은 당시 극심한 당쟁으로 권력이 양분되든 때에 서인 대표 정사 황윤길과 동인 대표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 허성을 서장관으로하고 정탁을 사은사로 해서 1590년 3월 6일 출발한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데 끝까지 대립해서 서로 충돌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이 통신사들을 보살피면서 그런 당쟁관계로 대립하는 정-부사를 눈치채지 몯할리 없었을것이다.

아마도 전쟁준비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통신사들에게 자기들의 전쟁준비를 숨겨서 역이용하려 했을 것 아니었겠나는 생각이 든다.

교토로 갖던 통신사는 1591/음력 1월/28일돌아온다. 

그해 3월 이들은 조정이 준 임무를 정사와 부사가 서로 다른 보고를 하게된다.

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 서장관 허성은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 온다”고 했으며, 

동인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도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보고해서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조정은 부사의 의견을 따랏다.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서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서 명을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기 때문에 그 발판이 되는 조선 침략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던 터이었다.


조정이 일본의 불침을 믿은 나머지 국방을 소홀히 해서 우리가 전화에 힘쓸린다는 이야기와는 좀 다른생각으로 보면 적어도 조정이 통신사에게 이런 임무를 부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있을지도 모를 일본의침략에 안테나를 세운 것은 확실하고 따라서 방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임진왜란당시 지금으로 치면 4개의 함대사령부(경상 좌-우수영,전라좌-우수영)가 남해바다에 주둔시키고 있었던것을 보면 통신사의 보고와는 상관없이 나름대로 해상방위는 철저히 한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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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월의 화창한 봄날 동래부사는 조선조정의 정사,부사,종사관을 비릇한 400여명의 귀한 손님들을 극진히 대접해서 약1년반이상이 걸리는 바다건너 오사카 까지의 대 여정을 위해 한양에서 지금부산의 당시 동래부까지 온 여독을 풀어주고 환송연회를 베푼다. 


조선통신사

역사상 귀한 이 행사는 이웃나라와의 통신(신뢰를 전함)을 위해서 약 200년간 국가간의 사절단을 파견하고 일본은 전체비용을 들여서 극진히 환대하는 큰 행사를 치른 역사적인 행사가 바로 조신통신사이다. 


지금 부산에는 곧 출발하는 통신사들의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가 열린다. 
그때 동래부의 사람들만큼은 아니겠지만 고증을 거처서 그 오랜 시간 우리가 문화를 전달하던 행사가 오늘에 재현되고 있다. 

지금도 그정도 인원이 움직인다면 큰 규모일 것인데 300녀년전에 400여명의 정부사절단이 움직인다는 것은 치밀하고 대단한 행렬이었을 것임엔 틀림없다. 

길가에 늘어선 일본인은 당시에 우리의 사절단이 입고지나가는 의복이나 신발이나 의관이나 심지어는 말에 부착된 작은 장식까지도 그들에겐 새로운 문화로 받아들여 유행이 될 만큼 강력한 한류의 전달식이기도 했었다. 

지금 우리는 한류가 일본을 힘쓴다고 하지만 사실 한류는 오랜 역사적인 뿌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임나일본이라고 하는 대가야는 사실은 우리의 문화를 일본에 뿌려준 것이라는 것을 전 일본에서 발굴되고 있는 대가야형 토기나 금장유물에서 알 수 있으며, 
백제가 한때 강력한 힘으로 일본에 문화를 전수했으며 이후 백제유민이 일본의 근대화의 주축이었다는 사실은 설명할 필요도 없이 알려진일이며 시기는 다르지만 일본에는 도래인 이라고 하는 어정쩡한 표현을 쓰는 사람들이 그들의 문화를 일깨워준 것은 바로 한반도에서 건너간 것이지 하늘에서 도래한 것은 결코 아니지 않는가. 

지금도 한류는 계속해서 강하게 일본을 몰아친다. 그들은 온갖 정치적인 수단으로 한류를 거부하려 애쓰지만 민심과 시류와 문명은 역행할 수는 없다. 

오월의 부산에는 온통 조선통신사의 축제로 떠들썩하다. 
서양인이나 아시아 여러 민족이나 당사국인 일본이이나 구분없이 용두산,남포동,중앙동을 중심으로 외국인들이 북적댄다. 

그들이 이 오래된 문화를 다 이해할지는 모르지만 또하나의 한류로서 세계로 전파되는데 일조하리라는 생각이다. 

조선통신사를 유네스코에 등재시키기 위해서 노력 중이며 머지 않아 그 노력이 결실을 보리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조선통신사 예행연습장에서 간단한 블로그 일기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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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 이야기- 미나미지로의 웃을수도 없는 비석

미나미지로는 일제 강점기때 제7대 조선총독이다. 
지금은 이미 허위임이 증명된 임나일본설을 믿은 나머지 대가야의 유적지 고령의 향교 부근에 임나대가야성지任那大伽倻國城址)라는 커다란 비석을 자기이름(南 次?(남차랑) みなみ じろう,)으로 세우고 대가야가 자기들의 옛 터전이라는 인식으로 벌린 웃지도몯할 해프닝을 연출한 자이다. 

임나일본이란 대략 4세기~6세기에 가야가 위치한 한반도 남부를 일본이 지배했다는 가설인데, 미나미 지로의 임나 비석은 바로 이를 근거로 잘못된 역사적 인식에 따라서 고대사의 일부를 자기들 편의대로 기정사실화하기 위해서 벌린 일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점령할 명분을 고착시키고 역사적으로 합리화하려고 안깐 힘을 쓰면서 근거를 마련하려 했을 당시에, 역사적으로 자기네 연고지를 찾는다는 구실을 세우고 침략을 정당화하려는 일환으로 전혀 사실관계가 정립될 수 없는 역사적인 오류를 무시하고, 임나대가야성지(任那大伽倻國城址)라는 지역을 합리화 하기 위해 고령의 대형고분들을 발굴이라는 허울아래 마구 훼손하였지만 학술적으로 임나 일본이 성립될 어떠한 근거도 제시하지 몯한채 정치적인 힘으로 기정사실인 것처럼 왜곡한다. 

대가야 지산리고분



그는 전후 A급 전법으로 분류되어 형을 산 자이며 조선총독중에서 가장 악랄한 군인정치가이다.그의 악행 중에는 인류역사상 전무 후무한 창씨개명을 실시한 자이다.사람의 성을 바꾸라는 지시를 내린 어리석고 미련한 행동을 실행한 것이다. 

고령의 대가야는 역사적으로 볼 때 잘 다루지 않은 한 부분으로서 최근에 발굴을 토대로 한 역사가 빛을 보며 이야기되고 있는 지역이며 그곳의 독특한 문화는 알아볼수록 대단했던 지역으로 나타나고 있다.사실 가야는 엄연히 존재한 큰 나라였지만 정사(正史)에 언급이 없고 유사(遺史)에 금관가야와 함께 건국 부분이 기록된 것이 조금 있어 알고 있을뿐이다. 

대가야 인들이 남겨 논 고분군의 숫자가 얼마나 되는지도 모르지만 숲속에 훼손되어 사라지고 농경지 아래 묻혀진 많은 것들을 다 찾을 수는 없겠지만 1만기도 넘을 것으로도 말하곤 한다. 

앞으로 강력한 국력을 바탕으로 청천이 후손들이 발굴해 가면서 우리의 묻혀진 역사가 제대로 밝혀질 것으로 믿지만 이렇게 잊혀진 역사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역사가 쓰여질 당시의 청치적인 이유가 있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우리의 광대하고 엄연한 고구려역사를 왜곡하는 이른 바 중국의 동북공정이라는 역사왜곡이 시작되고 있다. 세월이 가고 그 증거가 명백히 드러나면 그들 스스로 역사의 진실을 무시한 오류를 인정랄지는 모르지만 먼저 우리가 우리의 국력을 키워서 우리역사를 똑바로 지켜 내는 것이 먼저 일것이다. 

우리가 힘이 모자랄때 역사의 진실까지 바꿔치기 하려든 것을 잊어서는 안되며 우리의 역사와 그 속에 면면이 흐르는 선조들의 정신까지도 국력이 그것을 지킬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지금도 일본은 영토에 관해 억지를 부리는 파렴치를계속하고 있는 나라이다. 

이웃나라들에게 착하고 진실되게 행동하라고 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며 우리의 힘으로 우리것을 지키고 잘못을 징벌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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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미지로의 악행과 경력. 

제7대 미나미 지로 조선총독(1936년 8월 5일-1942년 5월 28일)출몰(出沒):미나미 지로(일본어: 南 次? みなみ じろう, 남차랑, 1874년 8월 10일 ~ 1955년 12월 5일). 

내선일체라는 허울로 위장해서 조선을 괴롭히고 지원병 제도를 만들어 강제로 징용해서 청년들을 중일 전쟁에 참전시켰고 일본어를 강제사용하게 했으며 악명높은 창씨개명을 주도했고 신사참배,이른바 황국신민의 서사라는것을 암송하게 하는 등 민족정신 자체를 말살하는 정책을 강행한 자이다. 

겉으로는 자율적이라는 허울로 기만하며 시행한 창씨개명의 극심한 반대에 부딭혔고 1942년 총독직에서 해임되었다. 

역대 조선 총독 중 가장 악독 잔인하고 혹독한 통솔정치를 한 자이며 종전 후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아 복역했으나 노령 및 건강 악화로 석방된 뒤 곧 사망했다. 

일반인으로서 고고학 강의를 듣고 배운 지식으로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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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8호 좌수영성지(左水營城址).

좌수영성지(左水營城址)는 수영사적공원 일대를 말하며 지금은 도심 속에 묻혀서 마음먹고 찾아가지 않으면 지나칠만큼 도심 속에 가려저 있습니다.

수영구 망미동과 수영동 일대인 이 지역은 수영팔도시장에서 북쪽방향으로 약간경사진 곳의 작은 구릉지에 있습니다. 


이성은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이 있던 곳 임으로 지금으로 치면 해군기지 사령관이나 함대 사령관 정도의 장군이 있는 곳의 군사 방어 시설물로서 한반도 남해안 일대를 커버하는 조선수군의 중요한 시설물입니다.


지금은 많이 사라지고 초라하게 보이며 몇몇 흔적만 남아 있지만 당시에는 경상좌도 수군의 주진(主鎭)이었던 곳으로 당시 벼슬로서는 정3품의 무관이 있던 군사영지였습니다.


부산 광역시 지정 기념물 제8호 좌수영성지(左水營城址)

이 성지(城址)의 역사를 알아보면 경상좌도 수군의 본영으로서 처음에는 감만이포(戡灣夷浦 부산감만동 포구)에 있었는데  조선 태종때에 울산 개운포(開雲浦 울산개운포)로 진영을 옮겼다가 임진왜란 직전에 군사요충지를 감안해서 부산의 동래부 남촌(지금의수영동으로 옮겼습니다.


1636년 인조13년에 당시 사천(絲川)인 지금의 수영천이 범람하여 수군 선창이 매몰유실되어 감만이포(戡灣夷浦)로 다시 옮겼습니다.


1652년 효종3년에 들어와서  감만이포(戡灣夷浦)가 당시 성행하는 왜관이 가까워 군사정보의 누설을 우려해서 이곳 수영으로 옮겼습니다.

이후 1852년 고종32년에 시행된 군사개혁으로 수영이 혁파될 때까지 243년동안 사용된 조선수군경상좌수영성(朝鮮水軍慶尙左水營城)이 었습니다.  


당시 관제(官制)를 보면 경상좌수영에는 정3품 수군절도사가 주재하며 휘하 관할에 1개 첨사영(僉使營)이 있고 상당한 수군이 배속되어 있었습니다.

군사 규모는 좌수영 본진 예하 7개의 진이 있고 65척의 전선(戰船)이 배속되어 있으며 45척의 나룻배를 보유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담당 군사 방어 지역은  낙동강 동쪽에서 경주까지 한반도 남동해안 방어 임무의 총책을 맡고 있었습니다.


이 성의 최초 축성연대는 불확실하며 현재의 것은 1652년 이곳으로 옮긴 이후 재 축성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성을 쌓은 성석(城石)에는 언양,양산등의 인근 지명이 새겨저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인근 관할 주민들을 동원한 것으로 보이며 이 시기는 좌수영을 옮긴 직후일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성의 규모는 둘레 약 2.7Km 성 높이 약 4m였으며 성내에는 3개의 우물이 있었고 성곽 외부로 통하는 4대문과 배숙4곳 옹성(甕城),치성(雉城),보루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이 훼손된 시기는 일제시대라고 하며 이때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음으로서 폐허화되어 지금 남은 것은 일부 성벽과  홍예 (虹霓)문(무지개형 아치문을 말함) 배수구 등이 있습니다.

부산시립 박물관이 이 지역을 발굴 복원하고 있으며 부산의 사적지로서 교육의 현장으로도 활용되고 있는 중요한 사적지입니다.


참고:

수영은 수군절도사영을 말하며 당시 4도수군 절도사의 편제로 한반도의 바다를 지켰다.4도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경기도 지역을 말한다.


수군도 조선시대의 군사전개 병법으로 보면 주로 좌군과 우군으로 나누는 것을 볼 수 있다.경상좌수영이라 함은 한양에서 남도를 볼 때 경상도지역의 낙동강을 기준으로 왼쪽을 말하는 수영(水營-수군절도사의 영지이다.


경상 우수영은 낙동강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있는 수영을 말하며 경상우수군절도사영은 충무
에 있었다.경상좌수군절도사영은 부산 수영(당시 동래부 수영에 있었으며 지금 말하는 이곳 좌수영 성지이다.

 

 전라도 좌우 수군의 절도사 영지를 보면 전라좌 수군 절도 사영은 전남 여수에 있었고 전라 우수영 절도 사영은 전남 해남에 있었다.


충청 수군 영지는 충남 보령에 있었으며 경기도 수군절도사영지는 남양 화량만에 있었다고 하지만  충청도와 경기도의 영지는 흔적도 없다고 합니다.


당시 품계로 육지에서 최고 사령관인 병마절도사의 품계가 종2품이었음으로 수군절도사의 품계는 정3품이기 때문에 지금의 해군기지 사령관(함대 사령관 정도로 추정됨) 병마절도사의 아래에 위치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수군 절도사를 지금의 군사제도로 본다면 아마도 제 몇함대 사령관쯤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당시 해군은 서해안과 남동해안을 방어하는데는 주력했다고 봅니다.특히 남동해안에 4개함대를 배치한 것을 보면 해양방어 특히 일본에 신경쓴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말하는 이곳 좌수영은 부산에서 동해안까지 커버하는 가장 중요한 수영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고로 알아보면 임진왜란 발발 때에 남해 수군 절도사(수사)는 경상좌수영절도사 박홍, 경상우수영절도사 원균, 전라좌수영절도사 이순신, 전라우수영절도사 이억기 였다고 합니다. 



본 정보는 좌수영성지 않내판을 참고해서 본인이 터득한 지식을 덧붙여 쓴 것입니다.만약 역사적 오류가 있다면 덧글로 표시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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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유적 탐방기(3) 암벽에 새긴 선각화


냉골(冷谷)의 목 없는 여래좌상을 지나서 금오산의 약 4부 능선쯤의 높이에 있는 보기 드문 바위그림을 만난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21호인 이 선각 육존불은 보통 접할 수 없는 불화로서 바위에 불상을 조각하지 않고 그림을 선으로만 각인한 작품이다. 

그림 자체가 모래밭에 그린 것처럼 윤곽이 부드럽고 전체적인 그림이 아름답게 표현된 미술품이다. 이 바위그림은 삼존불이 나란히 두 개로 옆에 삼존선각불이 하나 더 새겨져 있어서 옆의 그림을 합해서 육존불이라고 한다. 만약 바위의 자연적으로 찢겨진 흠이 없는 그냥 깨끗한 평면에 그려진 것으로 상상하며 바라보면 사실 그림기법이 현대인들이 그린 것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묘사법으로 그린 그림이다. 

신라 유적 탐방기(3) 암벽에 새긴 선각화



그림에 나타난 얼굴의 표정이나 모양이 남산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봐왔던 삼존 불과는 그 형상이 전혀 다르다. 그림이 그려진 바위의 크기는 대략 높이 4m 정도의 두 개인데 폭은 앞의 바위는 4m 정도이고 뒤에 있는 것은 7m 정도로서 뒤에 것이 더 넓다. 제작할 때 당연히 정으로 쪼아서 홈을 파서 만들었겠지만 쪼아서 만든 조각이라고 보기엔 너무나 부드러운 선감을 느낄 수 있다. 꼭 현대인이 사용하는 자동기계를 사용해서 파낸 것 같다. 

이 두 블록의 마애삼존 선각불은 만든 시대나 조각자 등의 내용은 모른다. 관계 자료들을 보면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할 뿐이다. 이 조각은 만든 기법이 정교한 선각이며 표현력이 부드럽고 우수해서 우리나라 선각마애불 중에서는 최고의 작품으로 보고 있다. 불상은 앞쪽 바위의 삼존불에서 가운데 본존은 서 있고 좌우에 협시 보살은 반쯤 앉아 있는 모습이다.

본존불의 높이는 2.65m, 협시 보살의 높이는 1.8m 정도이다. 손모습이 현대 제작된 불상과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석가모니불로 보이며 오른손을 올려 들고 왼손을 배에 대고 있는 모습이다. 협시 불의 보살은 무릎을 반쯤 꿇고 본존을 향해 예를 갖추어 무엇을 공양하는 자세로 보이는데 협시 보살이 공양하는 내용물은 그림이 오래되어 분명히 알 수는 없다.
 
뒤편 선각 삼존불은 앞쪽 삼존 불과는 반대로 본존은 앉은 자세이고 양 협시 보살이 서있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좌우의 협시 보살이 평온한 표정으로 연꽃을 밟고 본존을 보며 서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크기는 본존불의 높이는 2.4m, 양쪽의 협시 보살 높이는 2.6m 정도로 파악되고 있다. 불상의 머리 뒤쪽에는 음각으로 된 두광과 신광을 나타낸 것이 뚜렷하게 남아있고 아래쪽에는 여느 불상처럼 연화대좌를 조각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필자가 답사할 때는 습기가 좀 있는 계절이며 바위색깔도 밝지는 않은 상태였으나 모든 선각들이 뚜렷이 보였다. 이 계곡이 냉골이란 이름이 붙을 정도로 숲 계곡이란 것을 알 수 있다. 바위 뒤쪽 부분에는 법당이나 요사채를 세웠든 흔적으로 보이는 바위벽의 구멍이 남아 있고 바위의 윗부분에는 홈을 길게 파서 빗물이 직접 마애불 위로 흘러내리지 않도록 배수로를 만들어 놓은 흔적도 보인다.

돌에 파놓은 물골 바로 앞에 보호 처마를 만든 것으로 보이는 보호대를 씌웠던 작은 바위홈이 양쪽에 있다. 여기를 방문하기 전에 문화재청에서 제공하는 정보를 보고 익히고 왔지만 백문이 불여 일견 (百聞不如一見)이라고 했던 말처럼 생생한 작품을 직접 감상하며 감동받을 수 있었다. 이 불상을 지나서부터는 산의 경사도가 좀 더 가파르기도 해서 여기서 잠깐 식음료를 마시며 일차 휴식도 한 곳이다. 
 


<시니어리포터 정주호>




[역사이야기/역사,시사,설화,] - 신라 유적 탐방기(3) 암벽에 새긴 선각화

[역사이야기] - 신라 유적 탐방기(2) 머리 없는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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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유적 탐방기(2) 머리 없는 불상

삼능계곡을 오르면서 3능 을 보고 지나서 완만한 경사의 오솔길을 올라가면 제일 먼저
만나는 이 아름다운 예술품은 보는 사람에게 충격으로 다가오지만 충격도 잠시이고 들끓는 의문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자세히 보면 미술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눈으로 봐도 그 오랜 풍상을 거치면서 남아있는 섬세한 무늬와 옷고름 같은 영총이 늘어진 표현은 놀랍도록 정교하다. 


이 우수한 조각품이 그 모습을 드러낸 것은 계곡에 묻혀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64년 동국대학교 역사 발굴팀이 발견한 것이라고 하며 현재의 이 금오산 등산로 삼능계곡 길가로 옮겨 놓은 것이라고 한다. 

나는 역사학자가 아니며 미술전문가도 아니지만 역사탐방이 재미있어서 자주 탐방길에 오르며 그때마다 밝혀지지 않은 미스테리 같은 역사의 현장을 만날 때는 나만의 가설로 짜깁기를 해보며 아득한 옛날로 거슬러 가보는 재미를 느끼곤 한다. 

이 섬세하고 뛰어난 조각품은 분명 불상이다. 이 불상의 모습에서 의복은 신라인의 복식이라고 추정하지만 사실은 신라 아닌 곳의 유적에서도 옷고름 같은 영총은 종종 보고된다고 한다. 

만약 머리가 온전하고 무릎이 온전하다면 그 자태가 지금 여느 사찰에 있는 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아름다운 조각품일 것이라는 추정을 할 수가 있다. 이 조각품은 불상의 모습이라기보다는 편히 앉아있는 보통사람의 모습이 느껴진다. 

이 아름다운 미술품이 왜 머리를 잃게 되었으며 견고한 암석으로 된 두꺼운 무릎 부분이 이렇게 망가져야 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훼손한 범인을 어설픈 추측으로 함부로 말해서는 더욱 안 된다. 확실한 것은 이렇게 훼손된 것이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이 불상이 훼손되기 이전 신라나 그 이후에도 사람들로부터 아름답고 귀한 불상으로 자리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이 불상이 유명한 것은 어쩌면 머리를 잃고 무릎이 깨진 후가 아니겠는가 생각한다. 

깨지고 망가져서 방치된 채로 오랜 세월을 침묵한 이 불상이 나타나고 여기 현대인들의 마음으로 무릅이나 머리 모습을 상상하게 함은 또다른 메시지를 전하려 하는지 모른다. 

 


머리없는 불상신라 유적 탐방기(2) 머리 없는 예술품


<시니어리포터 정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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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부른 3.1만세
이 사진은 3.1절 날 우리 지역 동래에서 재현한 만세사건의 한 장면입니다. 나는 병술생이니까 그때 그 장소에 있을 수는 없는 나이입니다. 그러나 일제가 떠나고 난 이후 매년 우리는 그날이 올 때마다 일제의 만행을 상기하면서 우리의 후손들에게 영원히 잊혀질 수 없도록 그때 그 정신을 이어받아 이 행사를 해 나갈 것이며 나도 매번 동참합니다. 

여린 비무장의 학생들이 지르는 함성과 동조하는 주민들의 만세 소리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는가 했을 때 탕탕하는 총소리가 나고 왜경이 총검으로 마구 도륙을 내었던 그때가 눈앞에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리고 그때 그 장소에 함께 고함치던 학생들 중에 나도 있었다는 착각에 잠시 빠져 들었다. 

아직도 일본은 과거를 똑바로 보려고 하지 않는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유럽의 독일과 같은 나라와는 전혀 국민성이 다른 종족이다. 어떤 사실도 자기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끼워 맞춰서 자기 합리화를 하고 세계가 인정하는 진실도 무시해 버리는 아주 독선적인 나라이다. 

오늘날 일본이 독도가 자기 나라 땅이 아니라는 것을 왜 모르겠습니까? 일본에도 수많은 학자가 있고 그들도 세계사를 알며 우리나라 역사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자료가 남아 있으며 그들이 남긴 정부문서에도 도처에 기록되어 있는 엄연한 사실들은 감추고 진실을 왜곡하여 거짓으로 선동하며 국민들을 부추기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가 일본보다 우수하고 강력했던 기간이 훨씬 깁니다. 그러나 근세사의 몇 페이지에서 우리가 내분으로 약해지고 잘못된 명분으로 국정을 운영하여 나라가 힘이 없었던 때에 그들은 근대화한 국력으로 우리나라를 짓밟았다. 우리가 당한 누란으로 고통받은 사실은 결코 잊을 수도 없고 잊어서는 안 되는 우리 민족의 수치입니다. 지금 우리의 후학들이 그 잘못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잊지 않으려고 오늘 여기 손에손에 태극기를 들고 아우성치며 만세를 부르는 것입니다. 

나도 그때를 상상하며 그곳의 한 사람이 되어 힘차게 만세 소리를 내었습니다. 이때만은 우리는 모두 하나 된 동족이며 적군은 모두 왜놈입니다. 지금도 우리는 시시각각 왜곡되고 날조된 일본의 간계를 국제사회에서 마주치고 또 파렴치하게도 우리 영토를 자기 것이라고 우기는 비열한 이웃 나라와 접해서 살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국력이 약해진다면 왜놈들은 그때 3.1 독립만세를 부를 때 총검으로 마구 덤비던 것보다 훨씬 발전된 방법으로 달려들 것으로 봅니다. 

우리의 적군은 나라밖에도 있지만, 우리가 더욱 경계해야 할 것은 안에 있습니다. 나라 안에서 분열하고 패거리 짓던 지나간 역사의 잘못을 거울삼아 깨닫고 스스로 약해지는 어리석은 일이 되풀이 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보면 한 나라가 망하는 것은 내분이 원인이 되어 국력이 소진되고 마침내 적에게 침탈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오늘 이 만세 소리 우렁찬 군중 속에서 이렇게 단합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과거처럼 될 수 없다는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일본은 온 국민이 뭉치기 위해 그들 국민의 시선을 나라밖 영토분쟁으로 몰아가고 있다. 우리는 발악하는 이들을 가장 슬기로운 방법으로 꼼짝 못하게 해야 한다. 바둑에서 상대가 천방지축 마구 둘 때 따라 두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수가 될 것이며 악수에 이끌려서 휘말리면 그 판을 패배하고 만다. 지금 일본은 악수를 마구 두고 있다. 우리는 신중한 자세로 흥분하지 말고 슬기로운 강수를 둘 때가 왔다. 오래 끌고 왔던 이 지루한 바둑을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왔다는 생각이 든다. 





-3.1정신 계승하여 국력을 키우자- 

<시니어리포터 정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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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도 왜성


역사이야기 2012.08.10 21:22

 

우연히 만난 죽도 왜성


부산경남  경마장을 지나서 장유를 거처서 김해를 가는길에 맞은편 주유소 옆의 작은 안내판을 보게됬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때에 조금 높은 구릉지엔 바람이라도 있을줄 알고 차를 주유소옆에 대고 올라가 봤다.

현재 행정구역으로는 는 부산시 강서구 죽림동 823번지 일대이다.


이 작은 구릉지의 언덕은 가락산이며,
해서 가락성이라고도 한다.


사실 죽도 왜성은 구포왜성과 더불어 그 옛날 한반도 남부를 대부분 점령한 왜군이 이순신이 바다를 점령할때 해안 곳곳에 왜성을 쌓고 내륙에서 공격하는 조선군을 맊고  장기전을 위한 포석을 한 흔적들이다.

동남해안선을 따라서 바닷가를 중심으로 방어라인을 구축한 것인데,


이 죽도 왜성은 불과 30여m의 낮은 구릉지에 어렵게 먼곳에서 돌을 운반하여 쌓은 성인데 맞은편 구포 왜성과 함께 낙동강을 중심으로 방어라인을 구축한 것 이다.


사실 왜성을 우리가 복원하고 보존할 필요는 없겠지만 ,

여타 왜성에 비해서 이 죽도 왜성은 훼손이 심각한 수준으로 보인다.


꼭대기엔 이름모를 분묘들이 존재하고,

성곽이 제1제2제3으로 구성된 환형으로 짐작되나 이미 사라진 형태로서 약간의 존재만 있을뿐이었다.


말 그대로 죽도엔 대나무 숲이 우거저 있고 한여름 풀숲을 혜치고 윙윙거리는 모기떼를 쫓아가며 답사를 마친 나들이 기록을 쓴다.

상부엔 이상한 씨멘트 구덩이도 있는데 그 용도나 이유는 모르겠다.
낙동강 김해 지류인 서낙동강변의 아름다운 풍광은 카메라가 없었다면 후혜할뻔 했다.




구릉지엔 바람한점 없는 찌는듯한 더위때문에 오래 머물수 었었으며 내려오는길에 6.25 참전용사 추모비를 방문했다.



죽도 왜성



죽도 왜성 위치



서낙동강 풍광


죽도 왜성


죽도 왜성


죽도 왜성에서 본 서낙동강


죽도 왜성


죽도 왜성


죽도 왜성


죽도 왜성


죽도 왜성


죽도 왜성 입구



[분류 전체보기] - 구포왜성(龜浦倭城).

[역사이야기] -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여행,관광,지역소개/부산이야기] - 오랑대 나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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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강서구 가락동 | 김해 죽도 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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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www.walkview.co.kr BlogIcon 워크뷰 2012.08.13 08:5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아니 김해에 죽도왜성이 있군요
    한번 가보고 싶어집니다^^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일원 (052)229-3730
서생포 왜성:임진왜란 초인 1592년(선조 25년) 7월부터 1593년(선조 26년)에 걸쳐 일본장수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축조했으며,
죽도왜성과 부산왜성, 울산왜성과 봉화로 서로 연락하였다해서 봉화성(烽火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왜성은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조선에서도 사용했던 성으로, 남문 일부의 훼손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16세기말의 일본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평산성이다. 본성과 지성으로 구분되어 구획되어 있다. 성벽은 외성(外城)의 경우 바깥쪽에만 돌로 쌓는 내탁식(內托式)으로 하고, 내성(內城)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였으며, 기울기는 지면에서 60˚내외이다.
서생포왜성은 16세기 말기의 일본 성곽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의 성곽 축조에도 일시 응용된 바 있다. 

본성:
모성(母城) 혹은 내성(內城)이라고도 구분한다.
회야강 강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 고지의 산정(山頂)에 혼마루를 축조하고 아래로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를 겹으로 두르고, 동북쪽 경사진 외곽에 약 6m의 노보리이시가키를 계단식으로 축조하여 본성과 연결해 놓고 있다.[2]이것은 각 구루와에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아래로 산 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지성(支城)을 배치하였다.
본성에는 장군수와 천수각이 있다. 그리고 북문과 서문도 본성에 있다. 장군수는 옛날에 이곳에 머물렀던 일본군 장수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위 성벽이 파괴되면서 우물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천수각:
천수각은 일본의 성에서 상징적인 건물로써 성곽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평소에는 왜장이 머물고 전쟁 때는 전쟁을 지휘하던 곳이다.
현재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데 천수의 흔적은 없지만 돌계단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천수에서 주위를 보면 산이 있는 서쪽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트여있어 좋은 전략적 위치라는것을 알 수 있다.

성문:
서문은 성 전체로 보면 남쪽 방향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문을 나서면 해안으로 갈 수 있어 일본군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을 문으로 생각된다.
기록을 보면 이 성에는 문이 여럿 있는데 오직 서문만 살아 나올 수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이 지역이 서생면이 된 것도 이 문과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북문은 '죽음의 문'으로 불린다. 북문은 천수각 바로 위에 있다. 그런데 이문은 문의 이름만 있지 실제로 문은 없다. 따라서 옛날에 서생포왜성에 들어왔던 적병 중 이곳이 문인 줄 알고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고하여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지성:자성(子城) 혹은 외성(外城)이라고도 한다. 지성에서 본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발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를 지나야 한다. 니노마루와 산노마루가 있는 곳에도 해자가 있어 적이 쉽게 접근을 못하게 되어 있다. 아울러 이 성은 동서로 또 다른 성과 연결시켜 놓았다.

창표당:창표당은 서생포왜성에서 일본군과 전쟁 중 전사를 한 우리 장병들을 위해 선조 32년(1599년)에 세운 사당이다. 창건 당시의 창표당에는 위패를 봉인한 본당 등 건물이 여럿 존재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배 밭에 울산시가 세워 놓은 표지판만 있을뿐이다.


동제당:
동제당은 서생포왜성을 점령할 때 공을 세웠던 명나라 장군 마귀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또 성 동문에는 서생포왜성에서 전투를 벌였던 명나라 장군 편갈송이 정전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거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기념비를 세워놓고 관리를 하고 있다.

해자:
성벽 밖에는 2, 3중으로 해자를 둘렀다. 성곽의 전체 면적이 해자를 포함하여 46,000평에 이르고 해자를 제외한 성 외곽부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 거리는 동서 약 870m, 남 북 약 370m에 달해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성의 내외부에는 다수의 우물터가 확인된다.


임진왜란
가토 기요마사
문서에 서생포왜성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593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朱印狀)에 의한 축성명령이며, 같은 해 5월 히데요시 명령서에 성 이름을 알 수 없는 성의 수비에 가토 기요마사, 그 수비장에 사가라 나가쓰네(相良長海)가 명령되어 있는데, 한성(서울)에서 퇴각한 가토 기요마사는 그대로 서생포에 들어가 축성을 개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구체적인 일시는 알 수 없지만, 1593년에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같은해 9월의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강화에 방심하지 말고 성을 견고히 하라"고 명령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명령서로 보아 서생포왜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손에 의해 보이는 성의 원형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정된다.
1594년에는 평화교섭이 활발히 진전되어 4월에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회견을 하였다. 1595년 6월 28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부산왜성, 죽도왜성, 가덕도왜성 등의 몇 개를 남기고 여러 장수를 순차 일본으로 귀국시켰는데,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기장의 죽성리왜성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한때 폐성이 되었다.
1596년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귀국하여 후시미(伏見)로 향했는데, 같은 해 9월 평화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 1번대가 되어 약 1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 기장과 양산을 거쳐 한때 폐성으로 되어 있던 서생포왜성에 입성했다.[4]
이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이 방면의 군사적 책임자가 되고, 같은 해 2월 21일자 히데요시 명령서에 수비 책임자로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에게 3,000명의 재번을 명령하고 있다. 같은해 3월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회담을 했다. 같은 해 7월 21일경에 아사노 요시나가가 서생포왜성에 입성하고, 가토 기요마사는 북위작전을 위해 출진하고, 같은 해 9월 아사노 요시나가는 혼마루의 토목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0월말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서생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울산에 최전선인 울산왜성이 생기면 일본군의 점령지 수비는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았는데, 같은 해 11월 10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축성된 것이 울산왜성으로, 12월 중순 이후 성의 외곽부분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울산왜성은 갑자기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약 보름동안 비참하고 처절한 울산왜성에서의 농성전이 벌어진 것이다. 같은 해 1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왜성의 수비만 전념케 하고, 서생포왜성에는 모리 가쓰노부, 시마즈 다다토모, 이토 스케타카,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카즈키 타네나가, 사가라 나가쓰네 등 여러 장수가 입성하여 수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1598년 5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지금까지 구포왜성에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서생포왜성에 수비담당자가 되어, 이후 폐성까지 나가마사가 지키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더 이상 이 전쟁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10월 15일자 고다이로(五大老)가 나가마사 앞으로 보낸 명령서에서 "울산이 공격을 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10월 27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서에는 "기요마사와 협의하여, 서생포성을 퇴각하여 부산성으로 입성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11월 24일에 기요마사와 나가마사 등이 부산왜성에서 일본으로 귀국길에 오르자,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 입성. 점령했다.

서생포진성: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서생포와 부산의 다대포에 동시에 쳐들어와 서생포에는 서생포 만호진성(西生浦萬戶鎭城)에 만호(萬戶)를 두었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임진왜란 후, 서생포 만호진성의 수군만호는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로 승격되었으나, 일본군이 축조한 서생포왜성의 성곽이 견고하다 하여 수군동첨절제사를 인근의 서생포왜성으로 이동하게된다. 이래 서생포 만호진성은 폐성이 되고, 서생포왜성은 대진(大鎭)으로 승격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서생포왜성은 조선의 서생포진성(西生浦鎭城)으로 사용되었다.

1872년에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蔚山西生鎭地圖)를 보면 서생포왜성의 외성(外城) 내부의 관청건물, 그리고 주변 지역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서생포진성의 남문 근처에는 시장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전선이 정박해 있는 수군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서생포 왜성의 외성이 대촌(大村)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글내용: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서생포왜성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행정구역상 위치 :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 일원
시지정기념물지정일 : 1999년 3월 9일지정번호 : 제 48호 
 
죽성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연합군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남해안 일대에
장기간 주둔할 목적으로 남해안을 벨트로 연결하며 견고하게 쌓은 성들 중  하나이다.

1594년 선조 27년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일제이 성을 쌓았다.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고 조선과의 장기전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했다.



왜군은 1594년 5월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이하 20여명의 장수가 서로 협력해서 축성했는데,
이 죽성리왜성도 그때 쌓은 왜성 중의 하나이다.

왜성들은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얕은 구릉지가 바다에 연한 장소를 택했으며,
보급선의 왕래에 유리한 포구가 있는곳을 택하고 있다.

이성 또한  기장군 죽성마을 뒷편으로서  현재의 두모포 해안이 가까이 있음을 알수 있다.
이성의 크기는 구릉지에 돌출된 작은 산 정상을 택했으며 요충지의 둘레는 약 1kM이고 성벽 높이는 약 4m 정도 이며 3단으로 축조 된 석축(돌담)성이다.

죽성리 왜성은 일본에서 부산포성이라고 부르는 증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한데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 한다.

울주군에 있는 서생포성(西生浦城)과 울산의 학성(鶴城), 그리고 증산왜성을 연결하는 방어벨트 중에 가운데부분으로 요충지에 자리 한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탐방해 보면 성곽의 주요 부분은 지금도 잘 남아 있다.
다만 평지에 가까운 외곽 부분은 밭으로 일구어저 경작되고 있으며 아랫부분은 민가에 의해 많이 점유되고 있다.
죽성리왜성은 인근 두모포진성과 함께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어서 우리나라 축성법과 일본식 축성법을 비교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탐방하면서 느낀점은 진입로가 지그재그로 이어지며 길위에 성곽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할수 있도록 층층 계단을 돌아 들어가는 형태로서 ,
지금처럼 곡사포를 쏘지 않는한 공격이 아주 힘들게 구성되어 있다.
소총만으로 공격한다면 지금도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기장 진아항

진하 해안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서생포왜성의 천수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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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광역시 울주군 서생면 | 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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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2.16 05: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機張竹城里倭城,毛利輝元,黑田長政,구로다나가마사,기장죽성리왜성,기장성,데루모토,부산포성,서생포성,왜성,임진왜란,정유재란,죽성리왜성,증산왜성

  2.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2.16 0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행정구역상 위치 :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 일원
    시지정기념물지정일 : 1999년 3월 9일지정번호 : 제 48호

    죽성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연합군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남해안 일대에
    장기간 주둔할 목적으로 남해안을 벨트로 연결하며 견고하게 쌓은 성들 중 하나이다.

    1594년 선조 27년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일제이 성을 쌓았다.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고 조선과의 장기전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했다.

  3.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2.16 0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행정구역상 위치 :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 일원
    시지정기념물지정일 : 1999년 3월 9일지정번호 : 제 48호

    죽성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연합군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남해안 일대에
    장기간 주둔할 목적으로 남해안을 벨트로 연결하며 견고하게 쌓은 성들 중 하나이다.

    1594년 선조 27년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일제이 성을 쌓았다.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고 조선과의 장기전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했다.

  4. Favicon of https://dragonphoto.tistory.com BlogIcon 드래곤포토 2012.02.16 2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장에도 왜성이 있었군요
    사진으로 보면 서생포왜성과 흡사하네요 ^^

  5. Favicon of https://www.walkview.co.kr BlogIcon 워크뷰 2012.02.18 0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성리 왜성 다녀오셨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