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이었으나 흩어 저 버린 생각 단편들
천년도 더 이전에 원효(元曉)원효(元曉) 선사는 말하고 있다 一心
원효(元曉, 617년 ~ 686년 3월 30일, 경상북도 경산): 삼국시대의 신라 고승이자 철학자, 작가, 시인, 정치인.
법명:원효(元曉), 속성(俗姓): 설(薛), 속명: 사(思),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 본명:설사(薛思).
별명: 모(毛), 호:화정(和淨). 아버지: 내 말 설담날, 태종무열왕의 둘째 사위, 아들:설총.
별명: 소성거사(小姓居士), 서곡사미(西谷沙彌), 백부논주(百部論主), 해동법사(海東法師), 해동종주(海東宗主).
고려시대:원효보살, 원효성사(元曉聖師),
시효:화쟁국사(和諍國師). 본명은 설사(薛思)이지만 법명으로 원효대사로 불린다.
경주 설 씨와 순창 설 씨의 중시조인 설총의 생부, 한국 최초의 대처승.
사진 무단카피 금지-훼손금지
해동초조화엄강사원효대화상지진영
이제 흩어 저버린 단편들의 생각을 다시 모아 보려고,
선사열전을 섭렵하는 마음으로 원효(元曉) 선사를 알아본다.
원효는 한국 최고의 불교사상가로서 당시 사회지도자로도 볼 수 있는 스스로 깨우친 신라의 고승이다.
신라 진평왕 39년 617년에 당시 압량군 불지촌에서 태어나서 신문왕 6년 686년에 성불했다.
현재의 행정구역으로는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신월동이라고 한다.
속성은 설(薛)이며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이다.
즉 설서당이다. 혹은 설서동임.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원효를 잉태할 때 유성이 품으로 들어오는 꿈을 생모가 꾸었다고 하며 그를 낳을 때는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꿈대로라면 이미 태어날 때 득도하여 성인이 되게 되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설총 또한 이미 정해진 일이란 생각도 든다.)
아명 서당은 속어로 털이며 서당은 새털을 의미한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출산할 때 집 근처의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다급하게 해산하게 되어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서 출산한 데서 연유된 이름이라고 한다.
원효(元曉)라는 이름은 그가 10세 전후에 출가한 뒤 스스로 첫새벽 시단[始旦]을 뜻하는 원효라고 지은 것이다.
그는 그의 법명 원효라는 이름처럼 한국 불교 사상뿐만 아니라 이 땅에서 철학 사상의 새벽을 연 것 임엔 틀림없다.
불교가 공인된 지 100년이 지났으며 이때 불교국가 신라에는 많은 고승들이 있었지만, 원효가 득도하여 佛法을 깨우칠 때는 특정한 스승 없이 스스로 깨우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젊은 날의 원효에 대한 자료가 없는 것은 득도 이전에 무명의 승려에 대한 기록이 없기 때문이라고 본다.
당시 원효가 공부한 흔적은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유가(儒家)와 도가(道家)까지 광범위한 학문을 닦았으며 불교 수행자로서는 간절한 마음으로 최고의 고행을 하면서 득도한 것으로 본다.
그가 남긴 우수한 학문서나 경서 등의 저술들의 깊이에서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원효는 당나라로 두 번 유학하려 했으나 첫 번째는 실패하고 두 번째는 도중에 크게 깨달아 돌아왔다.
원효가 34세 때 의상(義湘)과 함께 당나라 유학을 위해 압록강 건너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당 수비군에게 잡혀 고초를 겪고 되돌아왔다.
두 번째는 45세 때 역시 의상과 함께 해로(海路)를 이용해 당(唐)으로 가려고 백제 당주계(唐州界)로 갔는데 이미 어둡고 비바람이 처서 어느 한 땅막에서 자게 된다.
아침에 일어나 봤을 때 지난밤 잠든 곳이 오래된 어느 무덤 속임을 알았지만 계속되는 비 때문에 하룻밤을 더 자게 되었다.
그날 밤 원효는 동티(귀신들이 애를 먹임)를 만나서 잠을 이룰 수 없었지만 이는 도리어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된다.
같은 장소에서 하룻밤은 땅막에서 편히 보냈고 하룻밤은 귀신집에서 시달린 것이다.
원효는 마음이 일어남과 갖가지 법(현상)이 발현됨은 땅막과 무덤이 둘이 아님처럼 원효는 "삼계(三界)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萬法)은 오직 인식일 뿐인데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어찌 따로 구할 것이 있느냐? 를 알게 된 것이다.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마음밖에 법이 따로 없다는 사실이 곧 진리이다.
당에 진리가 있다면 신라에는 없겠는가.
그의 이 깨달음은 후대 사람들에 의해 더욱 발전각색되었다.
그가 무덤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았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바로 그런 것이다.
유학을 버리고 스스로 정진해서 불전의 연구와 저술 그리고 대중교화에 몰두한다.
그가 남긴 저술은 무려 100여 종 240여 권(또는 86부 180여 권)으로 알려지고 있다.
원효는 대승 소승불교를 막라한 저술을 하며 깊은 學解를 남기며 지금도 최고의 불교해설서로서 대승기신론소와 금강삼매경론은 그의 탁월한 이해와 견해로서 중국불교계에 역유입되어 최고의 학습서로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아쉽게도 저서 유작 중에서 19부 22권만 남아서 1천3백 년의 장구한 시간이 흐른 지금도 진리를 말하며 읽히고 있다.
그중에서 수많은 일화가 함께하는 금강삼매경소,
원효사상의 개론서로 보는 화쟁을 풀이한 십문화쟁론 등은 현재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원효철학의 집대성이라고 말하는 대승기신론소를 포함한다.
"대승기신론"은 금강경, 원각경, 능엄경, 과 함께 우리나라 불교의 근본경서의 논서이다.
대승기신론은 당시 인도에서 대립던 중관파와 유가파(유식파)의 양대 불교사상의 문제를 화합시키는 이론으로 진과 속이 별개가 아니며 진속 일여이고, 더러움과 깨끗함이 둘이 아니라 염정불이라는 사상을 표현한 논서이다.
이를 간단히 언급한다면,
사람이 잘못을 저지르는 속세에서 깨달음을 향해서 끊임없이 수행하면 마침내 완성된 인격 "진"을 이루며,
깨달음에 이른 사람은 아직도 염오한 단계에서 고생하는 중생을 이끌어가야 한다는 사상이 "진속 일여", "염정불이"이다.
대승기신론의 기존 논의에 관한 9종의 연구서를 집필했지만, 현재 4권(대승기신론소 2권, 대승기신론별기 2권)이 남아서 전해온다.
국가 종파등을 초월해서 지어진 "대승기신론"에 대한 많은 주석서들이 있으나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원효의 "기신론 삼소"로 불리고 있다.
기신론 3소:
중국 정영사의 혜원(서기 523∼592)의 주석서인 /정영소」,
신라의 원효대사의 주석서인 소위「해동소」,
그리고 중국 화엄학의 대가 법장(서기 643∼712)의 /현수소」.
기신론의 3 소라고 하지만,
깊이 연구해 보면 원효의 "해동소"는 혜원의 "정영소"를 단연 능가하는 내용이며 "기신론"주석의 백미라 일컫는 법장의 "현수소"는"해동소" 내용을 카피한 대목이 많고 원효의 견해를 표현만 약간씩 바꿔 편집한 곳도 많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니까 현수소는 해동소가 있기 때문에 탄생된 저술이다.
당나라의 징관이 스승 법장으로부터 해동기신소의를 배웠다고 증언하고 있음을 송고승전도 밝히고 있다.
원효는 당시 당학을 배우지 않고 국내에서 터득한 학문과 사상으로 국경을 넘어 중국, 일본, 인도로 멀리 세계로 전파했다.
불출호 지천하란 노자의 말처럼 방 안에서 세계를 본다.
원효는 산속에 은둔하여 고행만 하던 승려는 아니었다.
서민 대중과 고통받는 하층민 그리고 신라가 정복한 지역 까지도 가엾은 중생들에게도 불법을 전파했다.
한 예로 원효가 과부가 된 요석궁의 공주와 잠깐 맺은 인연으로 설총을 낳은 후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姓居士)라 한 일은 득도한 사람의 파격이었을까?
이는 절대로 아무나 할 수 있는 그런 파격이 아니었음을 후에 알게 된다.
그 파계의 유산인 설총이 누구인가?
한국 유교의 문묘에 배향되고 있는 십팔유현중에서 첫 번째로 모시고 있는 사람이 바로 설총이 아닌가.
염정불이 진속 일여(染淨不二 眞俗一如)는 그의 학문적 이론이자 종교적 실천의 기초인데 지금도 이 계송은 유효하며 수많은 사람이 수행하고 있지 않는가?.
어쩌면 아주 쉬운 이론 같다.
더럽고 깨끗함이 둘이 아니고 진리의 길과 세속의 길이 본래 같다고 보는 이해는 참 해답이다.
이 답은 진리의 근원인 一心이 보는 결과이다.
이미 이를 깨달았기 때문에 원효는 훻씬 자유롭고 큰 삶을 살게 된다.
당시의 승려들이 왕실과 귀족들과 함께 城內 대사원에서 편한 삶을 영위하는 것과는 반대로 원효는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불사와 불법을 전파하고 중생을 계도한다.
그는 속인의 모습으로 무애가를 부르며 다녔다.
*무애가:
화엄경의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를 말한다.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어려운 사람들 사이에서 무애가를 부르며 희망이 없는 사람들에게 극락정토에 태어난다는 희망을 주는 진정한 보살행을 했다.
말년에 보살행(菩薩行)으로써 중생교화를 하다가 소성거사가 아닌 원효성사로서 穴寺(혈사:토굴)에서 신문왕 6년(686) 3월 30일 70세의 생애를 마쳤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원효사상의 요약
1. 일심사상:
일심사상은 저서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등 그의 저술에서 명시함.
귀일심원(歸一心源):
마음의 지식으로 깊이 통찰해서 본래의 생각대로 돌아가는 것 을 목표로 육바라밀(六波羅蜜)의 실천을 강조한다.
또 만법귀일(萬法歸一),
만행귀진(萬行歸眞)을 믿고 그에 따라 생활한다.
그의 철학은 일심이 만물의 주추이며 일심의 세계를 불국토(佛國土) 즉 극락으로 보고 이것을 대승불성(佛性) 열반이라고 보았다.
2. 화쟁사상:
원효는 불교의 종파를 타파하려 했으며,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고 "화엄경", "반야경", "열반경", "해심밀경 海深密經", "아미타경" 등 대승불교의 경전 전체를 섭렵하고 통달했다.
그래서 불교전체를 진리로 귀납시켜서 진리가운데서 분열이 있을 수 없는 높은 불교의 사상을 보여준다.
이런 조화를 이루려는 사상을 화쟁사상이라고 한다.
화쟁사상에 대한 저술:
십문화쟁론 十門和諍論,
원효는 십문화쟁론으로 일승불교(一乘佛敎)를 목표로 논리적인 체계를 제시 함으로써 한국불교에 귀일사상을 전하게 되어 큰 영향을 남겼다.
3. 무애사상: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 되는 것이다.
아무 걸림이 없는 사람은 단번에 생사를 벗어난다 라는
一切無碍人一道出生死 라는 그의 철학을 말한다.
귀일심원은 부처와 중생까지도 둘로 보지 않았으며,
무릇 중생의 마음은 원융하여 걸림이 없는 것이니, 태연하기가 허공과 같고 잠잠하기가 오히려 바다와 같으므로 평등하여 차별상(差別相)이 없다.라고 한다.
그래서 철저한 자유가 중생심(衆生心)에 본래 있는 것으로 보았고,
자기 스스로도 자유인이 되어 어느 종파에도 치우치지 않을 수 있었으며 최고의 일승과 일심을 주장했다.
불교의 모든 사상에 대하여 원효는 독자적인 사상체계를 보여준다.
불교나 학계 또는 세계불교에서도 원효의 업적은 대단하며 대 선사로 존경받고 있다.
우리나라 남부지역에서 광범위하게 보이는 크고 작은 사찰과 암자들에서 원효의 흔적들은 그의 역동적인 삶을 지금도 느낄 수 있다.
경남 양산에 있는 천성산은 산중턱의 넓은 풀밭에서 원효가 당나라의 승려 1000명에게 설법해서 그들이 모두 깨달아 성인이 되게 하였다는 곳으로 이름이 천성산이다.
수많은 곳의 원효암, 원효가 들어가는 지명, 산, 사찰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많은 그의 흔적들은 그의 믿음이 주는 역동적인 삶을 말해준다고 본다.
원효대사가 이미 금강삼매경을 자유자재로 사용해서 현재를 금강삼매화 한 이야기는 부산의 안적사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금강삼매경론은 : http://mtcha.com.ne.kr/korea-term/sinra/term15-gumgangsammegyongron.htm
금강삼매경론 1 : http://www.cbeta.org/result/normal/T34/1730_001.htm
금강삼매경론 2 : http://www.cbeta.org/result/normal/T34/1730_002.htm
금강삼매경론 2 : http://www.cbeta.org/result/normal/T34/1730_003.htm
번역: http://www.baekryunsa.org/bbs/skin/ggambo7002_board/print.php?id=brs_bul2&no=306
'철학-인물-교양'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일반인의 불교이야기(1)-산문(山門) (0) | 2019.02.01 |
---|---|
손없는날과 태백살(太白殺) 방위표 (2) | 2014.08.19 |
동양학과 음양오행(陰陽五行). (3) | 2013.12.28 |
더위탈출-영혼의 부족을 찾아서 (0) | 2013.07.16 |
베풂의 댓가 (0) | 2013.03.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