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탐방(寺刹探訪)-신어산(神魚山)은하사(銀河寺).

신어산(神魚山) 은하사(銀河寺)는 경남 김해시 삼방동 882번지에 위치한 사찰입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이며 종무소는 055 - 330 - 4434 ,  4411입니다.

은하사는 두 마리의 물고기를 뜻하는 신어산(634m)이 위용있게 둘러처진 중턱의 안온한 곳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의 말사입니다.
신어산은 오래전 한때 소금강산 은하산으로도 불리었다고 합니다.


김해는 가락국의 옛터로서 수많은 역사적 흔적과 이야기들이 담긴 수로왕과 허황후의 고장입니다.
이 은하사 또한 허황후의 오빠 장유화상과 밀접한 사찰입니다.


신어산(神魚山) 은하사(銀河寺)신어산(神魚山) 은하사(銀河寺)


사찰의 창건 연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해오는 여러 이야기중에서 가야의 수로왕 때 왕후인 허황옥의 오빠 장유가 창건했다고 합니다.
장유는 아유타국의 왕으로 부터 시집가는 허황옥을 보살필것을 명받고 가솔들과 함께 와서 7왕자를 생산한 허황후와 함께 번창한 가락국에서 소임을 마치고 은하사에서 불도의 길을 간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당시의 이름은 서림사(西林寺)였습니다.
신어산(神魚山) 동쪽에 장유가 세운 또다른 사찰 동림사가 있으며 서쪽에 있는 이 은하사를 서림사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사찰에서 출토된 토기 파편을 기초로 해서 살펴볼때 삼국 시대이전의 파편이 없다고도 합니다.
조선 중기 이전까지 있던 건물은 동림사와 함께 임진왜란 때 전소되었습니다.

현재 은하사의 건물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입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8호로 지정된 은하사의 대웅전 수미단에 있는 쌍어문양은 아유타국이 사용하는 문장으로 추정하며 허황옥과 관련이 있는것이 사실이라고 추정할수도 있습니다.

쌍어문양은 허황옥의 출신지로 알려지고 있는 아유타국이 인도의 한 왕국이라고 보고 종종 어필되는 문양입니다.
그래서 은하사가 있는 신어산이라는 이름이 우연이 아니고 '신의 물고기'라는 뜻으로 붙여진것으로 생각됩니다.

이 은하사는 진입로가 상당한 경사로이지만 진입하는 내내 잘 발달된 소나무숲이 참 좋습니다.
진입로의 아름다운 소나무 숲을 배경으로  영화 "달마야 놀자"가  촬영된 것으로도 유명합니다.

김해의 많은 유적중에서도 바로 인근에 수로왕릉과 허화후의 비능이 있으며 가야 시대의 고분과 유적들도 많습니다.


가락국 허황옥의 이야기에는 물고기나, 바다, 또는 물에 관련지어진 이야기가 많습니다.
부근의 삼랑진 만어사의 돌이된 수만은 물고기나,
신어산이나 쌍어 문양등이 전설처럼 대양을 건너오면서 바다에서 일어난 난관들을 신앙같은 힘으로 이뤄낸 결과에서 기인한것으로도 생각해 봅니다.

임진왜란으로 모두 불탔지만 조선말기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른것이지만,
경내의 어마어마한 기둥이나 전각들의 아름다운 양식들은 여느 사찰에서 볼수 없는 특별한 느낌은 받을수 있습니다.
특히 범종루 난간에 있는 머리는 용 몸은 고기 모양을 한 목어(신어(?))도 특이합니다.

김해는 사라진 제국 가야를 기억하게 하는 많은것들이 있지만 이 절 은하사에서도 깊은 역사성이 전해집니다.
아유타에서 건너온 허황옥이나 그의 수행장 오빠 장유 가 창건했다고도 하지만,
어쩌면 장유화상이 말년에 이 절에서 수도하며 여생을 보낸것일뿐인지도 모릅니다.
허황후와 관련된 절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곳의 무척산 모은암도 있습니다.

그리고 수로왕과 허황후의 일곱왕자에 대한 이야기는 이 은하사와 경남 질산에 있는 칠불사에서도 접할수 있습니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대웅전의 평면도는 정사각형 구조로 여느 사찰과는 다르며,
지붕또한 맞배지붕과 다포양식으로 조선후기의 확실한 특징을 보여줍니다.

사찰들이 대부분 풍수적으로 명당에 자리하지만,
이곳 은하사는 들어서면 방문자로 하여금 특별히 안온한 느낌을 받는 좋은 터로 생각됩니다.




은하사의 알려진 연혁
42년(신라 유리왕 19)     가락국의 시조 김수로왕이 창건
1594년(선조 27)     임진왜란때 전소
1644년(인조 22)     중건
1688년(숙종 14)     십육전(十六殿)의 16나한상을 조성
1753년(영조 29)     법고(法鼓)를 조성
1761년(영조 37)     시왕전(十王殿) 중수
1797년(정조 21)     취운루(翠雲樓) 중창
1801년(순조 1)     대웅전 중창
1803년(순조 3)     전사찰 중수
1812년(순조 12)     승당(僧堂), 취운루 중수
1831년(순조 31)     사찰 중수
1835년(헌종 1)     대웅전의 관음보살상 개금 ,후불탱 조성
1861년(철종 12)     대웅전 중창
1866년(고종 3)     청량암(淸凉庵) 중수
1892년(고종 29)     사찰 중수
1904년(광무 8)     대웅전의 후불탱 조성
1932·1938·1948년     사찰 중수함
1970년대 이후   대성(大成)스님이 30여 년간에 걸쳐 전각을 보수하고 도량을 정비함
연혁인용:http://www.koreatemple.net/korea_temple/traditional_temple/history/view.asp?temple_seq=1363&category_id=7&content_id=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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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 삼안동 | 은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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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여기 설명된 내용들은 김해박물관을 방문하여 그 안내문이나 책자와 김해시 자료를 토대로 삼국유사의 내용과 우리의 설화및 역사를 기본으로 해서 기술하였으며 역사 전문가의 글이 아니기 때문에 오류가 있을수도 있습니다.  
인용하지 마시길 바라니다.

김해 가락국 역사와 박물관 소장의 유물들을 보면서 가야사를 더듬어 먼저 삼국유사를 찾아 봤다.
길게 쓰여지지않은 가야건국 설화를 삼국유사 제2권 가락국기에 오가야(五伽耶) 편에 보면   아래와 같다.

가야국 구지봉


오가야(五伽耶)(아래는 직지프로젝트에서 삼국유사 해 한것입니다.)
<가락국기駕洛國記>의 찬贊을 상고해 보면, 자줏빛 끈 하나가 내려와 둥근 알[난卵] 여섯 개를 내려 주었다. 이 중 다섯 개 알은 각 읍邑으로 돌아가고 한 개는 이 성城에 있어서 수로왕首露王이 되었고, 각 邑으로 돌아간 다섯 개는 각각 다섯 가야伽耶의 주인이 되었다 한다. 그러므로 금관국金官國이 이 다섯 개의 수에 들지 않은 것은 마땅하다. 그런데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금관金官까지 그 수에 넣고 창녕昌寧까지 더 기록했으니 잘못이다)

아라(阿羅; 야耶라고도 했다)․가야(伽耶; 지금의 함안咸安)․고령가야(古寧伽倻; 지금의 함녕咸寧)․대가야(大伽耶; 지금의 고령高靈)․성산가야(星山伽耶; 지금의 경산京山 혹은 벽진碧珍)․소가야(小伽耶; 지금의 고성固城)이다.

또 본조사략(本朝史略)에는, "태조(太祖) 천복(天福) 5년 경자(庚子)에 오가야(五伽耶)의 이름을 고쳤다. 즉 1은 금관(金官; 김해부金海府로 됨), 2는 고령(古寧; 지금의 가리현加利縣이 됨), 3은 비화(非火; 지금의 창녕昌寧이니, 고령高靈의 잘못인 듯 싶다)요, 나머지 둘은 아라(阿羅)와 성산(星山)이다"했다(위 주注와 같다. 성산星山은 혹 벽진가야碧珍伽耶라고도 한다).

해-끝

수로왕능


수로왕과 허 황후.
한반도 최남단 동남쪽 끝의 낙동강은 비옥하여 태초부터 이강을 젖줄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살았을것은 당년하다.
설화에는 수로가 오기 전 까지는 지도자가 없었던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마을마다 간(干)이라고 하는 추장이 있었는데  그들은 아도간, 여도간, 피도간, 오도간, 유수간, 유천간, 신귀간 등 아홉 추장이었고 이추장을 통틀어 구간(九干)이라고 했다.
추장들은 각기 자기 마을을 통솔한 정도이 었다.
기록에는 아홉 마을의 총인구가 7만 5천 명이었고 농경에 종사했다고 한다.

매년 3월 첫 뱀의 날을 계욕일이라고 하는데 이날 제단을 만들어 놓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것으로 나온다.
 
당시 아홉 마을의 주민이 풍년을 비는 합동 제사였다.
어느 3월 아홉 마을 추장들이 제사 지낼때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바람이 불다가 갑자기 밝아지면서 구지봉에 구름안개가 감싸면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는데,

사적 자료로 보는 이야기는 당시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과 모인 사람들이 이삼백명이었다고 하며 이들이 구지봉가까이 갔을때  "이 곳에 누가 있는가" 라는 목소리가 났었고, 모인자들이 대답하기를 "우리들이 있다." 고   구간들이 답했다.
"내가 있는 이 곳이 어디인가."  구간들이  "구지봉이다."
 " 잘 듣거라. 나는 황천(皇天)의 명령으로 이곳에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될것이다.
너희들은 산 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구지가를 불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
龜 何 龜 何  首 其 現 也  若 不 現 也  燔灼而喫也
위번역내용은 실제로 한문의 구음이나 뜻에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노래는 삼국유사에서  여러 사람이 땅을 구르면서 이 노래를 부르자 가락국의 시조가 태어났다고 한다.

학술적인 언급으로는 ,
이 노래를 군주를 영접하는 노래 즉 영신군가(迎神君歌-임금을 맞이하는 노래)이다.
과거 사회에서 주술적,서사적, 노래와 춤이 엉킨 집단 무가(舞歌)로 보고 있다.

당시 전해지는 상황:
춤추고 노래하기 한참후에 하늘 한 가운데에서 자주빛 줄이 구지봉으로 길게 드리워졌고 붉은 보자기에 싸여 매달린 금합을 열어 금합 속의 둥근 황금 알 여섯 개를 보고 경배했다.
알은 아도간의 집 탑(榻- 깔거나 눕는 좁고 기다란 의자) 위에 둔지 하룻만에  잘 생긴 6명의 사내 아이로 변했다 한다.

아이들은 십여 일만에 키가 9척으로 빠르게 자랏고 얼굴은 용 같고, 눈썹은 팔색을 뛰며 눈동자는 두개씩인 대인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중 금빛 알에서 나온자를 성을 김(金)이라 하고 가장 먼저 태어난 사내아이를 으뜸이란 뜻으로 수로(首露)라고 했다느데,이가 김바로 수로왕이다.

그후 구간들은 그들을 임금으로 모시면서 비로소 질서가 있는 국가로 탄생한다.
첫 번째 임금인 수로가 다스리는 나라를 대가야 또는 대가락이라 했고 6가야 중에 하나였으며 실제로 제일 강력했다고 보는데 근거는 확실치는 않다.

나머지 다섯 사람도 다섯 가야의 임금이 되었는데 다섯 가야는 아라가야, 고령가야, 대가야, 성산가야, 소가야였다.

전하는 가야의 경계는 대가락을 이룬 여섯 가야국은 동으로 황산강, 서로는 창해, 서북쪽으로는 지리산, 동북으로는 가야산에 이른다고 한다.

수로왕은 왕위에 올라 국가적인 성곽 및 왕궁등의 기본적인 규모를 갖추었다.

가야지붕은 이엉을 자르지 않은 풀로만든 지붕이었으며 흙으로 만든 계단은 석 자 이상 크게 하지 몯하게 했다고 하는걸 보면 잡다한 법이 많이 생긴것을 알수 있다.
이 모양은 현재 김해에 복원형태로 실물모양이 잘 만들어 저 있다.

금관성파사석탑

수로왕의 도성은 외성의 둘레가 1천5백 이며 그 내부엔 궁궐과 여러 관청사와 무기고 및 창고등이 잘 정비 건축되었다.

야사에 보면 탈해와 수로왕의 변신술 재주 겨루기로 수로왕은 존경받는 군주로 묘사되고 있다.
이 이야기는 개인대 대인의 변신술인지 전쟁이야기인지는 확실치 않다고 본다.

유천간은 왕명을 받고 망산도에서 바다를 관망하던중에  가락국 앞 서남쪽 바다에 붉은 돛을 단 배 한 척이 상륙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수로왕은 아유타국과 어떤방법으로든 통신을 한것으로 보인다.

아유타국 공주인 허(許) 황옥(黃玉) 은 16세의 나이로 하늘의 계시로 수로왕을 찾아 배필이 되고자 온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공주는 신보, 조광 내외와 노예 등 20여 명을대동하고 왔다.
현재 까지도 인도에서 가야와 교류한 흔적이 기록으로 나온것은 없지만 분명 밀접한 교류가 있었다는 증명이 허 황후이다.


이후 수로왕은 157세에 생을마쳤으며 구지봉 동쪽에 장사 지냈고 허 왕후가 처음 와서 내린 나루터가 있는 마을을 주포촌(主浦村)이라 하며  비단 치마를 예물로 주기위해 벗었던 산등성이를 능현(綾峴)이라 하며, 허황후가 붉은 돛대를 달고 들어온 바닷가를 기출변(旗出邊)이라고 불렀다.


여기서 허황후가 올때 가져온 붉은기운나는 돌탑을 볼수 있으며 그 상징적인 것이 불교 즉 남방불교와 연관있을것으로 생각되지만 삼국유사에서 불교에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기록에도 허황후가 불교적 의식을 한 기록이 없는것은 그 탑의 성격을 가늠하기 어렵다.

삼국유사 탑상편 금관성파사석탑(金官城婆娑石塔) 조에는 파사석탑의 유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습니다.
금관성 호계사에 있었던 파사석탑은 이읍성이 금관국일때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이 후한 건무 24년 戊申:48년에 서역 아유타국에서 싣고 온 것이라고 한다.
공주가 부모의 명으로 바다를 건너 동으로 향하려 할때 水神이  노여움을 일으켜 바다가 거칠어저서 되돌아가니, 부왕이 탑을 싣고 가라 하여 그대로 한바 순조로이 바다를 건너 금관국의 남쪽 해안에 와서 정박할수 있었다한다.
탑은 사면이 5층으로  조각은 기묘하고 돌은 옅은 무늬가 있고 그 질이 좋으며 언듯 봐도 우리 나라 돌이 아닌것은 분명하다. 本草에 있는 닭 벼슬의 피를 찍어서 시험했다는 것이 이것이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허씨(許氏)와 인천이씨(仁川李氏)는 가락국 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동혈족이다.
허씨는 허황후의 후손임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모계(母系) 성(姓)씨이다.
시조 허왕후(許王后)께서는 왕자(王子) 열분을 두셨고 태자는 왕통을 이었으나
두 왕자느 이국에 출가했고 시조왕비를 위로하는 뜻으로 모후(母后)성을 계승케 했다고 한다.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된후 김해에 남아있던 허씨는 김해허씨가 되었고 그 시조는 허염(許琰)이시다.
그때 하양으로 이주한 분은 하양허씨(河陽許氏)이고 그 시조는 호장(戶長)허강안(許康案)님 이라고한다.

공암양천(孔岩陽川)으로 이주한 분들은 양천허씨 이고 그 시조는 허선문(許宣文)님 이라고 한다.
그래서 모든 허씨들은 김해 김씨와 부계-모계로 연결된 가락의 왕손이다.
 
인천이씨는 바로 허씨에서 갈라진 분적종(分籍宗)이며 시조는 고려 현종(顯宗)때 상서좌복야를 역임하신 이허겸(李許謙)이시다.
소성은 인천의 옛지명이다.

양천허씨 (陽川許氏)
시조는 가락국 김수로왕비의 30세손으로 전하는 허선문(許宣文)

태인허씨(泰仁許氏)
태인은 전북 정읍의 지명이며 시조 허사문(許士文)은 수로왕비 허황옥(許黃玉)의30세 손으로 고려태조 왕건의 부마 였으며 시산군에 봉해졌다.

하양허씨(河陽許氏)
지금의 대구옆 경북경산 하양에 있는 지명으로 시조 허강안(許康安)은수로왕비의 33세손이다.

인천허씨는 인천이씨로 보며, 인천이씨는(仁川李氏) 원래 신라시대 허씨성을 사용하던 허기(許寄)님 으로부터 출발해서 라고 합니다.




가야국탐방바로가기-1:
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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