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통신사 재현'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5.05 조선통신사 재현 현장에서 본 한일우호 깃발
  2. 2013.05.05 통신사와 당쟁

조선통신사 재현에서 한일우호라는 깃발을 보며 

부산에서 몇일째 열리고 있는 조선통신사 재현 축제에서 그 하이라이트인 행렬이 용두산공원에서 많은 부산시민과 일본에서 온 축제참가자들과 함께 식전행사를 마치고 날씨도 화창한 봄날 토요일 오후 종탑앞을 출발해서 광복동거리를 지나는 행렬은 말그대로 장관이었다. 

조선통신사 재현


정사,부사,종사관과 그를 따르는 수행자들을 그당시대로 재현하는 이 행렬은 부산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는 뜻깊고 큰 행사이다. 
지금도 이런행사를 하는데는 만만찮은 준비와 경비가 들고 번거로운데 약 400년전에 총400여명의 인원이 그 먼 여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오는 행사를 무려 12번이나 했다는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웃나라와 평화를 누리자는 믿음을 전하고 선린우호를 모티브로하는 정치적인 이유로 시작된것이며 때로는 속내를 감추고 때로는 과장하고 때로는 문화의 전달자로서 움직인 이 거대한 행렬은 우리조정은 우리대로 속셈이 정치적인 목표가 있었을것이고 일본은 일본대로 얻을게 있고 이용할게 있다고 생각하며 그 많은 돈을 들여 긴 여정 동안 400여명의 우리 사절단을 극진히 안내하고 대접했으리란 생각이다. 


조선통신사 재현과 한일우호



그때 그 행렬이 끝난것은 아니다. 

부산에서 열리는 이 큰 행사는 당시 일본을 지나던 길목인 곳곳에서 일본이 우리나라에 행사단을 보내고있다. 

정치적으로 일본과 우리와의 사이에 역사인식에 대한 문제나 독도나 대마도의 영유권에대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문화행사로서 조선통신사를 영접하는 행사로 한국과 일본이 함께 광복동 거리에서 나팔불고 손 흔들며 행진한다. 

어쩌면 아이러니를 포함하는 미묘한 행사라고 생각할수있지만 그들나라의 길목에있었든 예술단이 춤을추며 통신사를 환영하는 퍼포먼스는 예사롭지않게 화려하며 일본인이 흔드는 한일선린우호라는 큰 깃발은 그저 보고 넘길수만은 없었으며 길거리에서 일본인의 행렬에 박수치는 시민들의 마음을 잠간 생각해 봤다. 

우리는 다시금 한류문화를 가지고 일본열도로 출발하고 일본열도는 들끓는 환호로 우리의 통신사를 영접하며 우리의 이웃나라로서 조금은 어설플지 모르지만 이 귀한 역사적인 사실이 발전계승되어 유네스코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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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2)통신사와 당쟁


조선 통신사(朝鮮通信使)는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약200여년간 총12회에 걸처서 한일 양국간의 평화를 위해서 일본에 파견된 대규모 정부 사절단이다.

 

국가간의 신의를 거듭확인하는 목적이며 부산을 출발한후의 모든경비를 일본막부가 부담하는 초청외교사절단이었다.


구성은 정사,부사,종사관의 삼사이하, 화원,의원,역관,악사등로 구성되었다.

조선수도 한양에서 출발해서 에도까지 순탄할 때 1년반정도 걸리는 긴 여정을 치루는 큰 행사이다.


조선통신사(2)통신사와 당쟁



일본땅에 상륙하게 되면 통신사가 머무는 지역마다 대 환영행사가 일어나고 조선의 관리인 선비들로부터 글씨하나 받으려고 했으며 필담도 주고받으면서 지나가는 고을마다 문화교류가 일어났든 것이다.

통신이란 신의를 기반으로 양국이 전쟁을 방지하고 선린 우호관계를 유지하려 애쓴 하나의 국가간 행사이다.


그 오랜세월동안 통신사는 우여 곡절이 있었으며 대표적으로는 1510년 중종 5년에 삼포왜란이 발생해서 세종 이후 파견되던 사절 왕래가 중지되다가 선조시대에 들어와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줄기찬 요청으로 조정은 다시 파견한다.

조선 조정은 1590년 교토로 떠나는 통신사에게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속내를 알아볼 임무를 부여해서 보낸다.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할 의도가 있는지 탐지할 목적을 주어서 파견한 정치적인 특사였든 것이다. 

우리조정은 당시 극심한 당쟁으로 권력이 양분되든 때에 서인 대표 정사 황윤길과 동인 대표 부사 김성일과 역시 동인 허성을 서장관으로하고 정탁을 사은사로 해서 1590년 3월 6일 출발한다. 


정사와 부사는 일본 내에서도 임무를 수행하는데 끝까지 대립해서 서로 충돌했다고 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일본이 통신사들을 보살피면서 그런 당쟁관계로 대립하는 정-부사를 눈치채지 몯할리 없었을것이다.

아마도 전쟁준비를 하는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대한 통신사들에게 자기들의 전쟁준비를 숨겨서 역이용하려 했을 것 아니었겠나는 생각이 든다.

교토로 갖던 통신사는 1591/음력 1월/28일돌아온다. 

그해 3월 이들은 조정이 준 임무를 정사와 부사가 서로 다른 보고를 하게된다.

서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 서장관 허성은 “왜구가 반드시 쳐들어 온다”고 했으며, 

동인부사 김성일은 “침략의 징조도 없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보고해서 민심을 동요시킨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조정은 부사의 의견을 따랏다.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해서 손놓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국서에서 명을 침략한다는 ‘정명가도’가 있기 때문에 그 발판이 되는 조선 침략에 대한 대비는 하고 있던 터이었다.


조정이 일본의 불침을 믿은 나머지 국방을 소홀히 해서 우리가 전화에 힘쓸린다는 이야기와는 좀 다른생각으로 보면 적어도 조정이 통신사에게 이런 임무를 부여한다는 것만으로도 있을지도 모를 일본의침략에 안테나를 세운 것은 확실하고 따라서 방비를 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또 임진왜란당시 지금으로 치면 4개의 함대사령부(경상 좌-우수영,전라좌-우수영)가 남해바다에 주둔시키고 있었던것을 보면 통신사의 보고와는 상관없이 나름대로 해상방위는 철저히 한것으로 보인다. 



 

Posted by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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