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생포왜성(西生浦倭城)
울산 울주군 서생면 서생리 711 일원 (052)229-3730
서생포 왜성:임진왜란 초인 1592년(선조 25년) 7월부터 1593년(선조 26년)에 걸쳐 일본장수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가 축조했으며,
죽도왜성과 부산왜성, 울산왜성과 봉화로 서로 연락하였다해서 봉화성(烽火城)이라고도 부른다. 

이 왜성은 비록 일본이 축성했으나 후에 조선에서도 사용했던 성으로, 남문 일부의 훼손을 제외한 다른 곳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으며, 16세기말의 일본 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아즈치모모야마 시대의 일본식 평산성이다. 본성과 지성으로 구분되어 구획되어 있다. 성벽은 외성(外城)의 경우 바깥쪽에만 돌로 쌓는 내탁식(內托式)으로 하고, 내성(內城)은 안과 밖 모두를 돌로 쌓는 협축식(夾築式)으로 축조하였으며, 기울기는 지면에서 60˚내외이다.
서생포왜성은 16세기 말기의 일본 성곽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일본식 성곽은 임진왜란 이후 우리나라의 성곽 축조에도 일시 응용된 바 있다. 

본성:
모성(母城) 혹은 내성(內城)이라고도 구분한다.
회야강 강구의 작은 포구를 끼고 해발 133m 고지의 산정(山頂)에 혼마루를 축조하고 아래로 동쪽 경사면을 이용하여 복잡한 구조의 아래로 니노마루, 산노마루를 겹으로 두르고, 동북쪽 경사진 외곽에 약 6m의 노보리이시가키를 계단식으로 축조하여 본성과 연결해 놓고 있다.[2]이것은 각 구루와에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 아래로 산 아래까지 점차 길고 넓어지는 지성(支城)을 배치하였다.
본성에는 장군수와 천수각이 있다. 그리고 북문과 서문도 본성에 있다. 장군수는 옛날에 이곳에 머물렀던 일본군 장수들을 위한 우물이 있었던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주위 성벽이 파괴되면서 우물의 흔적을 찾기가 힘들다.

천수각:
천수각은 일본의 성에서 상징적인 건물로써 성곽에서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하고 평소에는 왜장이 머물고 전쟁 때는 전쟁을 지휘하던 곳이다.
현재  돌계단을 통해 올라가야 하는데 천수의 흔적은 없지만 돌계단은 아직 옛 모습 그대로 있다.
천수에서 주위를 보면 산이 있는 서쪽을 제외하고는 모든 방향이 트여있어 좋은 전략적 위치라는것을 알 수 있다.

성문:
서문은 성 전체로 보면 남쪽 방향이다. 지형적으로 보면 이 문을 나서면 해안으로 갈 수 있어 일본군이 가장 많이 드나들었을 문으로 생각된다.
기록을 보면 이 성에는 문이 여럿 있는데 오직 서문만 살아 나올 수 있는 문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이 지역이 서생면이 된 것도 이 문과 연결된 것이라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반면 북문은 '죽음의 문'으로 불린다. 북문은 천수각 바로 위에 있다. 그런데 이문은 문의 이름만 있지 실제로 문은 없다. 따라서 옛날에 서생포왜성에 들어왔던 적병 중 이곳이 문인 줄 알고 탈출을 시도했던 사람들은 모두 죽고 말았다고하여 '죽음의 문'으로 통한다.
지성:자성(子城) 혹은 외성(外城)이라고도 한다. 지성에서 본성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해발 니노마루와 산노마루를 지나야 한다. 니노마루와 산노마루가 있는 곳에도 해자가 있어 적이 쉽게 접근을 못하게 되어 있다. 아울러 이 성은 동서로 또 다른 성과 연결시켜 놓았다.

창표당:창표당은 서생포왜성에서 일본군과 전쟁 중 전사를 한 우리 장병들을 위해 선조 32년(1599년)에 세운 사당이다. 창건 당시의 창표당에는 위패를 봉인한 본당 등 건물이 여럿 존재했다고 전해지나 지금은 배 밭에 울산시가 세워 놓은 표지판만 있을뿐이다.


동제당:
동제당은 서생포왜성을 점령할 때 공을 세웠던 명나라 장군 마귀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또 성 동문에는 서생포왜성에서 전투를 벌였던 명나라 장군 편갈송이 정전 후에도 귀국하지 않고 조선에 귀화한 후 이곳에서 여생을 보낸거을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기념비를 세워놓고 관리를 하고 있다.

해자:
성벽 밖에는 2, 3중으로 해자를 둘렀다. 성곽의 전체 면적이 해자를 포함하여 46,000평에 이르고 해자를 제외한 성 외곽부의 길이가 약 2.5km, 평면상의 직선 거리는 동서 약 870m, 남 북 약 370m에 달해 남해안 각지에 산재하는 왜성 가운데 가장 웅장하다. 성의 내외부에는 다수의 우물터가 확인된다.


임진왜란
가토 기요마사
문서에 서생포왜성이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1593년의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서(朱印狀)에 의한 축성명령이며, 같은 해 5월 히데요시 명령서에 성 이름을 알 수 없는 성의 수비에 가토 기요마사, 그 수비장에 사가라 나가쓰네(相良長海)가 명령되어 있는데, 한성(서울)에서 퇴각한 가토 기요마사는 그대로 서생포에 들어가 축성을 개시했을 것으로 추정되므로, 구체적인 일시는 알 수 없지만, 1593년에 본격적인 축성이 이루어졌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같은해 9월의 히데요시의 명령서에는 "강화에 방심하지 말고 성을 견고히 하라"고 명령되어 있는데, 이러한 일련의 명령서로 보아 서생포왜성은 가토 기요마사의 손에 의해 보이는 성의 원형을 만들어 낸 것이라고 추정된다.
1594년에는 평화교섭이 활발히 진전되어 4월에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가토 기요마사가 회견을 하였다. 1595년 6월 28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부산왜성, 죽도왜성, 가덕도왜성 등의 몇 개를 남기고 여러 장수를 순차 일본으로 귀국시켰는데, 이때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기장의 죽성리왜성으로 옮겼고, 이때부터 한때 폐성이 되었다.
1596년 히데요시의 명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귀국하여 후시미(伏見)로 향했는데, 같은 해 9월 평화교섭이 결렬되자, 1597년 1월 가토 기요마사는 다시 1번대가 되어 약 10,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을 침입, 기장과 양산을 거쳐 한때 폐성으로 되어 있던 서생포왜성에 입성했다.[4]
이 이후 가토 기요마사는 이 방면의 군사적 책임자가 되고, 같은 해 2월 21일자 히데요시 명령서에 수비 책임자로 아사노 요시나가(浅野幸長)에게 3,000명의 재번을 명령하고 있다. 같은해 3월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에서 사명대사와 회담을 했다. 같은 해 7월 21일경에 아사노 요시나가가 서생포왜성에 입성하고, 가토 기요마사는 북위작전을 위해 출진하고, 같은 해 9월 아사노 요시나가는 혼마루의 토목공사에 착수한 것으로 보인다.
 
같은 해 10월말 가토 기요마사는 서생포왜성으로 돌아와서, 지금까지 가장 동쪽에 위치하고 있던 서생포에서 북동쪽으로 약 35km, 떨어진 울산에 최전선인 울산왜성이 생기면 일본군의 점령지 수비는 한층 강화될 것으로 보았는데, 같은 해 11월 10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축성된 것이 울산왜성으로, 12월 중순 이후 성의 외곽부분이 거의 완성되었을 무렵, 울산왜성은 갑자기 조·명 연합군의 공격을 받기 시작하였다. 1597년 12월 22일부터 1598년 1월 4일까지 약 보름동안 비참하고 처절한 울산왜성에서의 농성전이 벌어진 것이다. 같은 해 1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가토 기요마사는 울산왜성의 수비만 전념케 하고, 서생포왜성에는 모리 가쓰노부, 시마즈 다다토모, 이토 스케타카, 다카하시 모토타네, 아카즈키 타네나가, 사가라 나가쓰네 등 여러 장수가 입성하여 수비를 담당하게 되었다.
1598년 5월 22일자 히데요시의 명령서에 의해 지금까지 구포왜성에 있던 구로다 나가마사가 서생포왜성에 수비담당자가 되어, 이후 폐성까지 나가마사가 지키고 있었다. 같은 해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인해 더 이상 이 전쟁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10월 15일자 고다이로(五大老)가 나가마사 앞으로 보낸 명령서에서 "울산이 공격을 당할 때는 서생포를 단단히 지킬 것, 비상시에는 서생포성을 버리고 부산성으로 빠져나갈 것"을 명령하고 있다. 10월 27일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명령서에는 "기요마사와 협의하여, 서생포성을 퇴각하여 부산성으로 입성하라"고 명령하고 있다. 11월 24일에 기요마사와 나가마사 등이 부산왜성에서 일본으로 귀국길에 오르자, 명나라의 제독 마귀가 울산왜성과 서생포왜성에 입성. 점령했다.

서생포진성: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은 군대를 둘로 나누어 서생포와 부산의 다대포에 동시에 쳐들어와 서생포에는 서생포 만호진성(西生浦萬戶鎭城)에 만호(萬戶)를 두었으나, 이를 지키지 못하고 무너졌다.

임진왜란 후, 서생포 만호진성의 수군만호는 수군동첨절제사(水軍同僉節制使)로 승격되었으나, 일본군이 축조한 서생포왜성의 성곽이 견고하다 하여 수군동첨절제사를 인근의 서생포왜성으로 이동하게된다. 이래 서생포 만호진성은 폐성이 되고, 서생포왜성은 대진(大鎭)으로 승격되어 1895년(고종 32)까지 서생포왜성은 조선의 서생포진성(西生浦鎭城)으로 사용되었다.

1872년에 제작된 『울산서생진지도』(蔚山西生鎭地圖)를 보면 서생포왜성의 외성(外城) 내부의 관청건물, 그리고 주변 지역의 마을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서생포진성의 남문 근처에는 시장도 형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고 전선이 정박해 있는 수군의 모습을 볼 수 있어 서생포 왜성의 외성이 대촌(大村)으로 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글내용:위키백과 
http://ko.wikipedia.org/wiki/서생포왜성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행정구역상 위치 :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 일원
시지정기념물지정일 : 1999년 3월 9일지정번호 : 제 48호 
 
죽성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연합군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남해안 일대에
장기간 주둔할 목적으로 남해안을 벨트로 연결하며 견고하게 쌓은 성들 중  하나이다.

1594년 선조 27년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일제이 성을 쌓았다.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고 조선과의 장기전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했다.



왜군은 1594년 5월 왜장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이하 20여명의 장수가 서로 협력해서 축성했는데,
이 죽성리왜성도 그때 쌓은 왜성 중의 하나이다.

왜성들은 강이나 바다에 근접한 얕은 구릉지가 바다에 연한 장소를 택했으며,
보급선의 왕래에 유리한 포구가 있는곳을 택하고 있다.

이성 또한  기장군 죽성마을 뒷편으로서  현재의 두모포 해안이 가까이 있음을 알수 있다.
이성의 크기는 구릉지에 돌출된 작은 산 정상을 택했으며 요충지의 둘레는 약 1kM이고 성벽 높이는 약 4m 정도 이며 3단으로 축조 된 석축(돌담)성이다.

죽성리 왜성은 일본에서 부산포성이라고 부르는 증산왜성과 형태가 비슷한데 일본에서는 기장성이라고 한다.

울주군에 있는 서생포성(西生浦城)과 울산의 학성(鶴城), 그리고 증산왜성을 연결하는 방어벨트 중에 가운데부분으로 요충지에 자리 한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탐방해 보면 성곽의 주요 부분은 지금도 잘 남아 있다.
다만 평지에 가까운 외곽 부분은 밭으로 일구어저 경작되고 있으며 아랫부분은 민가에 의해 많이 점유되고 있다.
죽성리왜성은 인근 두모포진성과 함께 비교적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어서 우리나라 축성법과 일본식 축성법을 비교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탐방하면서 느낀점은 진입로가 지그재그로 이어지며 길위에 성곽에서 내려다보며 공격할수 있도록 층층 계단을 돌아 들어가는 형태로서 ,
지금처럼 곡사포를 쏘지 않는한 공격이 아주 힘들게 구성되어 있다.
소총만으로 공격한다면 지금도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기장 진아항

진하 해안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서생포왜성의 천수대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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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2.16 05:5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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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행정구역상 위치 :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 일원
    시지정기념물지정일 : 1999년 3월 9일지정번호 : 제 48호

    죽성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연합군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남해안 일대에
    장기간 주둔할 목적으로 남해안을 벨트로 연결하며 견고하게 쌓은 성들 중 하나이다.

    1594년 선조 27년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일제이 성을 쌓았다.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고 조선과의 장기전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했다.

  3.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2.02.16 05:51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장 죽성리 왜성(機張竹城里倭城)
    행정구역상 위치 : 기장군 기장읍 죽성리 603 일원
    시지정기념물지정일 : 1999년 3월 9일지정번호 : 제 48호

    죽성리 왜성은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가 축성한 것이다.
    임진왜란,정유재란 때에 왜군이 조선군과 명나라군의 연합군으로 부터 방어하기 위해서 남해안 일대에
    장기간 주둔할 목적으로 남해안을 벨트로 연결하며 견고하게 쌓은 성들 중 하나이다.

    1594년 선조 27년 봄 왜군은 전남 여수에서 울산에 이르는 우리나라 동남해안 일대에 일제이 성을 쌓았다.
    이 성들을 근거지로 삼고 조선과의 장기전을 위한 교두보로 이용했다.

  4. Favicon of https://dragonphoto.tistory.com BlogIcon 드래곤포토 2012.02.16 23:4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기장에도 왜성이 있었군요
    사진으로 보면 서생포왜성과 흡사하네요 ^^

  5. Favicon of http://www.walkview.co.kr BlogIcon 워크뷰 2012.02.18 02:2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죽성리 왜성 다녀오셨네요^^


부산의 진산 금정산-바위들의 무상(舞狀)
부산소개 그 세번채

산행을 하다보면 산마다 봉우리마다 형형 색색의 기암들이 있지만 부산의 금정산에있는 바위들은 하나같이 예사롭진않다.

한반도 최남단 끝자락에 뭉친 기운들이 마지막으로 뿜어내듯이 솟아있는 모습들은 대부분의 남부지방 산형이 장년,노년형인데  비해서 여기는 기상이 넘치고 살아있어 진화하는 모습으로 보여지는것은 예사롭지않은 이들 기암들 때문일 것이다.

크고작은 바위들이 줄지어 서있는 산자락을 따라 가면 천년고성이 끝까지 산행을 안내한다.
결코 크거나 높은산이 아니지만 이처럼 살아있는 무상을 연출하며 저아래 부산을 감싸는 이 영산은 부산의 역사이며 부산인의 자존심이다.

이 영산의 자락자락 에는 범어사,부산대학교,동래온천등 찬란한 문화가 면면히 이어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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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이 이산을 젊었을때부터 다니지만 그때는 철없이 샌달을신고 갔던산이다.
그러나 이제 산을 모독하는 것들을 알고 나서부터 산을 볼수있게 되었고 살아숨쉬는 바위들과 대화하게 됨으로서 저멀리 회동수원지를 염모하는 바위를 볼수있었다.

금정산이 지켜주고있는 부산을 감싼 고성의 흔적들을 고사목은 여전히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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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사목과 금빛 억새풀 사이로 보이는 아름다운 부산을 잠시 내려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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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bmking2015.tistory.com BlogIcon 달빛천사7 2011.01.31 06: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배경이 좋네염 연휴기간동안 놀러가기 좋겟네염

  2.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11.01.31 09:4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도심에 있어서 교통도 좋고 경관도 좋고 명승지도 있고 하루 나들이장소로는 젛습니다..




부산 충렬사
1605년 동래부사 윤훤은 충렬공 송상현공을 모시기 위해 동래성 남문 안에 송공사를 건립하고 위패를 모셔 매년 제사를 지냄.1642년에는 충장공 정발 장군도 배향하면서 충렬사라는 사액이 내려짐.현재의 자리로 이전한 것은 효종 3년 때이며 이때 비로소 사당이 정식으로 창건되고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유생들을 수용하면서 안락서원이라 칭함.
1978년 박정희 정권때에 호국성역으로 확장되어 총 92분의 위패를 모신 대규모 사당으로 발함.부산시와(재)충렬사안락서원에서 매년 2차례 춘추대제를 봉행함.

부산충렬사




충렬사는 언젠가 그리 오래되지 않은 정권때에 국민적 충효사상을 제고하는 국책적인 과제로 전국적으로 발굴 계발할 때에 재정비 되었다.

그자리에는 충렬사가 아니더라도 유서깊은 동래의 향교문화가 자리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당시 동래서원이 그곳에 있었다.

현재처럼 대대적인 충효사상을 고취하며 임진왜란때의 동래부사 송상현의 업적 또한 높이 기리는 작업을 병행해서 지금은 동래지방의 예절과 충효를 되새기는 자리로서 그 역할을 다하고 있는 곳 이다.

수시로 래방하여 관광하고 잊혀저가는 역사에 대한 고찰도 하는 교통이 좋은 안락로타리에 자리잡고 있다.

고궁이 아닌것이 고궁처럼 되어가고있는 곳 이며 그뒷산에는 동래성의 동쪽끝 동장대가 있고 그 잍에는 당시 군관들의 숙소도있다.
때때로 주민들의 산책로로 이용되며 괜찮은 숲이 보존돼 있다.
아쉬운 것 은 겨울만 되면 산을 아예 입산금지 하는데 산불이 겁나서 그렇게 한다고 한다.

충렬사의 사계절은 계절마다  독특한 향취가 있지만 가을의  정취는 더욱 아름답다.
충렬사의 가을을 몇장 담아봤습니다.


경내의 과일들이 아름답게 익어 있습니다.

부산충렬사

부산충렬사


한국식 인공정원의 연못이 단풍자락과 함께 예쁩니다

부산충렬사


은행잎의 낙엽밭은 환상적입니다.

부산충렬사


단풍사이로 보이는 가을 목과는 예쁘기만 합니다.
누가 못생긴 모과라고 했는지...

부산충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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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이 시작 되었던 그 해에.
동장대를 오르며 블기를 쓴다.


왜구가 국토를 유린하며 상륙하던날 송상현 부사가 저기 저 성루에 있었을지도 모른다.
칠월 무더운 날 고성의 언저리에는 무성한 수풀과 적막이 감돌고 어디서 들려오는 뻐꾸기(풀국새)가 구성진 소리를 내는 이곳에서 세월의 어디쯤에 와 있는지를 잊어 버리게 한다.

건강을 위해 산들을 오르지만 역사의 裸地는  한점도 숨김없이 수풀속에서 그때를 보여주곤한다.
한여름에 흘리는 땀과 함께 역사의 흔적을 더듬으며 산자락을 서성 거리노라면 그때를 영감으로 해서  역사가 상상의 나래를 달고 아득한 역사의 그때에 내가 와 있는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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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소개 그 첫번채
부산의 진산 금정산 - (1)
부산을 말한다면 수없이 많은 자랑거리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역사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태백준령의 한반도 마지막 기혈이 뭉처 부산에 쏟아붙고있는 금정산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백두대간은 우리지리서에 기록된 옳은 지칭이지만 아직 공식적으로 후학들이배우고 각종 시험에서 산맥 지칭으로 표시되고있기 때문에 대간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머뭇거려 집니다.

금정산은 행정구역상으로는 북쪽으로 경남 양산시 동면,동쪽으로는 부산 금정구, 남으로 동래구와 부산진구·연제구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부산 북구에 접하여 낙동강에 이르고 있는 부산인의 마음속에 자리하는 진산으로서 주봉인 고당봉(801.5m)을 중심으로 장군봉(727m),상계봉(638m),백양산(642m)까지 이어져 있고 그 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미륵봉, 대륙봉, 파류봉, 동제봉 등이있는 부산지역 명산이다.
 

원래 금정산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한 마리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 속에 놀았다"하여 산 이름을 "금정산"이라 전하고 있다.(東國輿地勝覽 권23 東萊縣 山川條).실제로 고당봉아래의 금샘에 가보면 바위위에 덩그러니 생긴 샘이 있다.바위에서 물이 솟아날리는 없지만 고여있는 물이 신비롭기 까지 하다.


금정산성은사적 제215호('71. 2. 9 지정)로 금정구 금성동 금정산 일대이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산성으로 성벽과 문 망루 등 많은 유적이 남아 있다.

산성길이가 17,337m, 성벽의 높이는 1.5m ∼ 3m정도.
성내의 총면적은 부산 안내문을 인용하면 약 2,512,000평(약 8,213㎢)이라고 한다.
 
금정산에 있는 산성의 최초 축조 연대는 기록이 없다고 한다.
고대로 부터 왜구의 침입이 있을때가지 이미 신라시대에는 축성이 있었던 것으로 이야기 되고 있다.

지금의 산성은 1703년(숙종 29)에 축성한 것으로 그 이전에 성이 있었음은 1667년(현종 8) 현종이 통제사 이지형을 불러 왜구방수계책을 논의하는 가운데 언급 확인된다는 부산의 자료이다.

산성을 둘러본다면 그 규모의 장대함을 알수 있고 수없이 많은 역사속에서 추가 복조 되었음을 알수있는데 특히 임진왜란때 많은 추가 조성이 있었음을 알수 있다.


Posted by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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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www.yupgiplus.com BlogIcon 엽기플러스 2008.09.10 20:2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신기해요. 금샘..

  2. Favicon of https://dramatique.tistory.com BlogIcon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2008.09.11 13:20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그렇습니다.많은 등산인들이 부산금정산에서 금샘을 볼려고 한답니다.
    그리고 그것을보기위해서는 상당한 발품을 팔아야한답니다.


부산소개 그 두번채
부산의 진산 금정산 - (2)

금정산이야기 첫번채 에서 행정구역이나 산의 대략적인 동식물 분포는 언급했음으로 이번에는 금정산을 오르는 코스중에 일반인이 가장선호하는 동문에서 고당봉까지의 등산로를 소개하고 가는도중 도중에 산재한 볼거리를 사진과 함께 조금씩 옮겨 볼것입니다.

동문입구에서 가든길(차도)로 곧장 100쯤 가면 주차장이 있습니다.
자동차를 가지고 오신분은 거기 주차하시고,온천장에서 버스를 타고오신분은 곧바로 동문표지쪽으로 600m정도 가면 동문이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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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을 들어서면 저멀리 아스라히 보이는 저곳으로 진행할것입니다.
지금부터 산행길 4.7KM를 갈것인데 ,산을 잘타는분들은 1시간 반정도 걸리며 보통사람이나 초보 산행인들은 2시간에서 3시간정도 보면 될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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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을 뒤로하면 곧장 울창한 솔숲이 기다리며 숲속의 완만한 들산로는 산림욕을 겸해서 어렵지않은 길이 펼처집니다.
금정산 휴식년제가 없는때는 산길 아무데나 갈수 있지만 휴식년제일때는 지정된 길로만 가야하며 오가는 등산객들을 스치며 기분좋은 인사들을 나누는것이 부산사람들뿐만아니라 산인들의 기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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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속길을 벗어나면 천리 낭떠러지길 아래 오른쪽으로 금정구 를 내려다보며 쉬원한 산바람을 옆으로 맞으며 빼어난 금정산의 견치를 만끽하게 될것입니다.
금정산은 명산이 그러하듯 유달리 많은 바위로 구성되어있고 하나하나 기암이 아닌것이 없는 살아있고 혼이있는 암석들이 눈에 들어 오는데 이런것들 다보고가면 몇시간 걸릴지 모르지요.
아예 중간에 앉아서 산행을 중지하고 하루를 놀다가는분들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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