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록으로 보는 인조대왕
용감한 인조대왕 삼전도편-1
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조선시대에서 가장혹독한 시련을격은 인조대왕의 삼전도의 치욕이 날때까지의 기록
의 원본을 살펴본다.

인조(祖) 에 자세히 기록된 자료가 명확한 우리의 조선제16대 왕이다.

인조실록은 고활자본(). 50권 50책. 규장각 도서. 1653년(효종 4) 6월에 중추부영사() 이경여(輿) 등이 찬수()하였고, 춘추관()에서 편집하였다. 표제는 인조대왕실록()이다.

실록으로 보는 인조는 27년이란 어쩌면 짧은 재위기간에 큰 국가적 위란을 격었고 중요한 정세변화를 잘못 감지했거나 유연하지 몯한 고집으로 정치를 펴서 종묘사직을 풍전등화로 내몰게된 연유는 있겟지만  우수한 군사적 지략 없이 대병과 맞싸우기도 하는 대란시대의 왕이었다고 생각한다.

總序

仁祖憲文烈武明肅純孝大王, 字和伯, 小字天胤, 在位二十七年, 壽五十五, 葬長陵

【태백산사고본】 1책 1권 1장 A면
【영인본】 33책 501면
【분류】 *역사-편사(編史) / *왕실-국왕(國王) / *변란-정변(政變)

인조실록
 

   ○ 仁祖實錄 元年(1623年)
○ 仁祖實錄 二年(1624年)



 

인조가 재위중 격은  가슴아픈 사건은 삼전도의 치욕인데 이부분을  실록에서 사실대로 확인한다.

1.청나라 군대가 움직인다.(금나라가 국호를바꾼 청)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1번째일기
능한 산성 대장 김진 등이 금나라 군대의 동태를 치계하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2번째일기
삼공이 박난영·강홍립의 자손들을 벌주도록 아뢰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3번째일기
병조가 변군으로 하여금 봉화를 강도까지 연결토록 할 것을 청하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4번째일기
승지 이여황이 피살된 의주 부윤·판관에게 포증하도록 아뢰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5번째일기
비변사가 호남과 영남의 연로에 보발을 설치할 것을 청하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6번째일기
헌부가 인심을 수습하는 글, 청나라 군의 동태 파악 등에 대해 아뢰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7번째일기
광해를 교동으로 옮기도록 하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8번째일기
보덕 윤지경이 임진강을 지킬 군사를 청하고 피난하지 말 것을 아뢰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7번째기사
광해를 교동으로 옮기도록 하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8번째일기
보덕 윤지경이 임진강을 지킬 군사를 청하고 피난하지 말 것을 아뢰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9번째일기
청나라 군이 출발했다는 장계를 보고 그 대책을 논의하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10번째일기
정주 목사 김진 등이 능한 산성에서 금나라 군대와 대치하고 있다고 치계하다

仁祖 15卷, 5年(1627 丁卯 / 명 천계(天啓) 7年) 1月 20日(戊子) 11번째일기
유배시킨 죄인 유대건 등 35인을 석방하다

1627년1월20일 인조실록에는 총 11건의 정사를 본 기록이 있는데,그중 6번채 일기가
 청의 외침에대한 기록 즉 군사동향을 기록한다.

인조 15권, 5년(1627 정묘 / 명 천계(天啓) 7년) 1월 20일(무자) 6번째일기
내용
헌부가 인심을 수습하는 글,
청나라 군의 동태 파악 등에 대해 아뢰다 

헌부가 아뢰기를,

“신들은 성덕에 누가 되고 인정에 거슬리는 것으로써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스스로 아는 체하고 남의 좋은 말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언로가 막혔고, 궁중이 엄정하지 않아서 정사가 혹 측근에 미쳤으며, 훈신이 농민을 모점(冒占)하여 원망이 벌떼처럼 일어났고, 내수(內需)는 사장(私藏)을 파기하지 않아서 여러 백성들이 남다른 고통을 겪었습니다. 호패를 시행한 일에 있어서는 인심이 이미 여기서 떠났고 기타 갖가지 정책에 실수를 범하여 원망을 초래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도 생각이 여기에 미치신다면 또한 반드시 두렵게 여겨 경계하실 것입니다.

영무(靈武)427) 의 애통조(哀痛詔)와 흥원(興元)428) 이 자기 자신을 죄책한 것은 인심을 수습하는 데 관계되는 바가 컸습니다. 조속히 몇 줄의 서찰을 내리시어 중외에 효유하여 회오(悔悟)하는 뜻을 보이소서.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우니 수신(帥臣)은 마땅히 밤길을 달려가서 방어책을 강구해야 할 터인데 장만은 분부를 받은 지 이틀 만에 비로소 벽제(碧蹄)를 떠났습니다. 하유해서 계칙하여 급히 전진하도록 하소서. 적병이 정주(定州)에 주둔한 지가 벌써 여러 날이 되었는데 정탐해 올리는 보고가 매우 드무니, 체찰사와 양서 감사가 있는 곳에 따로 선전관을 보내 하유하여 단단히 타이르도록 하시고, 파발과 봉수는 그대로 적간하도록 하소서.

관원이 많으면 일을 실패하는 것은 평상시에도 오히려 그러합니다. 더구나 이와같은 위급한 상황이겠습니까. 지금 분부를 받고 밖으로 나간 이들이 매우 많으니, 도체부 이외에 기타의 종사관들은 한 명을 초과하지 않도록 하소서. 마전(麻田)· 적성(積城)· 연천(漣川) 세 고을의 수령들은 삭녕(朔寧)의 예에 따라서 아울러 무관으로 골라 보내소서.”

하니, 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종사관은 이미 대동하고 있으니 감축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수령의 일은 비국으로 하여금 헤아려 처치토록 하라. 나 자신을 죄책하는 글을 이미 제도에 하송하였다.” 하였다.

실록원분:

○憲府啓曰: “臣等請以累聖德、拂人情者言之。 自廣狹人, 言路壅蔽, 宮闈不嚴, 政或及昵。 勳臣冒占田民, 而怨讟朋興; 內需不罷私藏, 而齊民偏苦。 至於號牌之擧, 人心已離, 其他種種失政招怨之道, 不一而足。 伏想殿下, 念及於此, 亦必瞿然警惕也。 靈武之哀痛, 興元之罪己, 其有關於收拾人心者大矣。 請亟下十行明札, 曉諭中外, 以示悔悟之意。 國勢岌岌, 爲帥臣者, 所當星夜以行, 規畫捍禦, 而張晩受命二日, 始離碧蹄。 請下諭戒飭, 急急前進。 賊兵留屯定州, 今已累日, 而探報甚罕。 體察使及兩西監司處, 別遣宣傳官, 下諭申飭, 擺撥、烽燧, 仍令摘奸。 官多敗事, 在平時尙然, 況此危急之秋乎? 卽今奉命出使者甚多, 請都體府外, 其他從事官, 無過一員。 麻田、積城、漣川三邑守令, 依朔、寧例, 竝以武弁擇送。” 答曰: “依啓。 從事官業已帶率似難減省。 守令事, 令備局量處焉。 罪己之書, 旣已下送諸道矣。”


태백산사고본 15책 15권 11장 B면,영인본 34책 161면,분류 *군사-군정(軍政) / *외교-야(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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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역사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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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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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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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제15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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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책.

편년체(編年體)는 한자문화권에서 사서를 쓸 때 사용되는 체제의 하나인데,
역사적 사실을 연, 월, 일 순으로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으로 동양에서 가장 보편적이고 전통적인 방법이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편년체 사서 중 대표적이며 가장 오래된 것은 공자의(孔子)노나라 역사서인 춘추(春秋)이다.

한자 문화권과 상관없이 세계적으로 역사적 사실을 순서대로 기록한 책을 말할때는 연대기(年代記)라고 한다.

기전체(紀傳體) 역시 한자문화권에서 사용하는 사서를 쓰는 체제중의 하나이며 사마천의(司馬遷)사기(史記)가 대표적인 서책이다.
본기(本紀)의 기(紀)와 열전(列傳)의 전(傳)을 따서 기전체라 부르게 되었다.

강목체(綱目體)도 한자문화권에서 사서를 쓸 때 사용되는 한 체제로서 편년체(編年體)의 일종으로 보며 연대순으로 역사를 기록하는 형식으로는 동일한 방식이지만 약간 차이가 있다고 한다.
주희(朱熹)의 자치통강목(資治通鑑綱目)이 이 서체의 대표이다.

내용
참고:야후지식
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J&qnum=6063606&kscookie=1

조선 태조부터 철종까지 25대 472년간 역사를 편년체로 기술한 책. 필사본 및 활자본으로서 국보 제151호인 기록물.
기록물의 소재지:국가기록원 부산지원,서울대학교 규장각도서관 소장.

25대 왕의 실록명칭 등 세부 내역은  아래의 표와 같다.
실록은 특정한 때에 한꺼번에 편찬된 것이 아니라 대대로 편찬한 것이 축적되어 이루어진 것이며, 노산군·연산군·광해군 때의 기록의 명칭을 일기라고 한 것은 세 임금 모두 폐위되어 왕자의 칭호인 군으로 격하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노산군의 경우 처음에는 《노산군일기》라고 하였으나 1698년(숙종 24) 단종으로 복위되었으며, 1704년(숙종 30) 《단종대왕실록》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일기라 해도 내용과 사료적 가치는 실록과 조금도 다름이 없다. 또한 선조·현종·경종의 경우 《선조실록》 《현종실록》 《경종실록》과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경종수정실록》의 2종류가 있는 것은 집권세력들이 자신들의 입지를 정당화하기 위하여 내용을 변개(變改)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고종실록·순종실록은 일제강점기 일본인들에 의해 이왕직(李王職)에서 편찬된 것으로 왜곡된 내용이 많아서 일반적으로 조선왕조실록이라 하면 태조~철종까지의 실록을 뜻한다.

실록은 왕이 죽으면 다음 왕 때에 편찬하는 것이 통례로서, 춘추관에 실록청 또는 찬수청을 두고 영의정이나 좌·우의정을 총재관으로, 대제학 및 기타 문장에 뛰어난 사람을 수찬관으로 임명하고, 도청(都廳)과 1·2·3 내지 6방으로 나누어 편찬하였다. 편찬자료는 <춘추관시정기>와 전왕 재위 때 사관들이 작성해둔 <사초(史草)>를 기본으로 삼고, 그 밖에 《승정원일기》 《의정부등록》과 후세에는 《비변사등록》 《일성록》 등을 자료로 삼았다. 이상의 기록들이 실록청에 모여지고, 1·2·3 각 방에서 편년체로 초초(初草)를 만들어 도청으로 넘기면, 도청에서는 초초를 보완 수정하여 중초(中草)를 만들었다. 이것을 총재관과 도청당상이 교열하고 체재와 문장을 통일하여 정초(正草)를 만들고, 실록으로 확정·간행하여 사고에 보관하였다.

실록의 기본자료로 특기할 만한 자료는 사관들의 사초이다. 춘추관 관직을 겸임한 관원이 모두 사관에 해당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예문관 봉교 2명, 대교 2명, 검열 4명이 전임사관이었다. 이들 전임사관은 직위는 비록 낮았지만 청화(淸華)한 벼슬로 국가의 각종 회의에 빠짐없이 참석하여 왕과 신하들이 나랏일을 논의·처리하는 것을 사실대로 기록하며 그 잘잘못 및 인물에 대한 비평, 기밀사무 등을 직필하였다. 따라서 사초는 비밀을 요하는 기록이었기 때문에 저마다 따로 간직하고 있다가 실록을 편찬할 때 제출하도록 되어 있었고, 제출된 사초는 극비성 때문에 사관 이외에는 전제왕권을 가진 왕이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실록을 편찬한 뒤에는 사초나 초초·중초·정초 등은 모두 물로 글귀 내용을 씻어 없앴다. 이것을 세초(洗草)라고 하며 실록편찬에 많은 양의 종이가 필요하기에 그 종이를 다시 쓰기 위한 목적도 있었지만 사초 내용이 바깥으로 흘러나갈 경우 필화사건 즉 사화(史禍)가 일어날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실록은 1413년(태종 13) 편찬된 《태조실록》을 시작으로 1426년(세종 8) 《정종실록》, 1431년(세종 13) 《태종실록》을 편찬한 뒤 3대 실록을 2부씩 등사하여 1부는 내사고(內史庫 서울 춘추관), 나머지 1부는 외사고(外史庫 충주 사고)에 보관하였으나 보존이 염려되어 전주·성주에 사고를 증설하고 다시 2부씩 더 등사하여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이후 《세종실록》부터는 실록을 편찬할 때마다 정초본(正草本) 외에 활자로 3부를 더 인쇄·간행하여 4대 사고(춘추관·충주·전주·성주)에 1부씩 보관하였다. 다만 태조·정종·태종 3대 실록은 활자화하지 못하고 처음 등사본을 그대로 보관하였다. 이렇게 사고에 보관하는 실록은 벌레와 습기에서 비롯되는 오손(汚損)을 막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바람과 햇볕을 쐬었고, 이상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형지안(形止案)을 만들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춘추관·충주·성주 3사고의 실록은 모두 소실되고, 전주사고 실록만이 안의와 손홍록에 의해 내장산으로 옮겨져 병화를 면할 수 있었다. 그 뒤 1593년 내장산에서 실록을 넘겨받은 조정은 이를 해주로 옮기고, 다시 강화도·묘향산으로 옮겨 보관하다가 왜란이 끝난 뒤 실록 간행사업을 일으켜 1603년 7월부터 3년 동안 《태조실록》부터 《명종실록》까지 13대 실록 804권 3부를 다시 출판하였다. 그 뒤 실록은 전주사고에 있던 원본과 다시 출판된 교정본 1부를 합쳐 5부가 갖추어져 1부는 서울 춘추관에 두고, 나머지 4부는 병화를 피할 수 있는 깊은 산중과 섬을 택하여 강화도 마니산·경상도 봉화 태백산·평안도 영변 묘향산·강원도 평창 오대산에 사고를 새로 지어 저마다 1부씩 나누어 보관하였다.

그 뒤 실록이 편찬될 때마다 위의 5대 사고에 보관하여 오다가 춘추관 소장본은 1624년(인조 2) 이괄의 난 때 화재로 일부가 불탔고,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일부가 강화도로 분산되었으며, 1636년 병자호란 때 다시 분산되면서 소실되어 그뒤로 복구되지 않았으며, 묘향산 소장본은 1633년 후금과의 외교관계가 악화되어가자 전라도 무주 적상산으로 옮기고, 마니산 소장본은 병자호란 때 크게 훼손되었으나 현종 때 완전히 보수하여 1678년(숙종 4) 강화도 정족산에 새로 사고를 지어 옮겼다. 따라서 인조 이후 실록은 정족산사고·적상산사고·태백산사고·오대산사고 실록만 남게 되었고, 그 뒤 철종까지의 실록은 편찬될 때마다 4대 사고마다 1부씩 보관되어 조선왕조 마지막까지 온전히 전하여 내려왔다.

그러나 국권피탈 이후 흩어져 있던 내사고본(內史庫本 춘추관 소장본)을 제외한 4개 외사고본이 조선총독부 명령으로 중앙에 한데 모여졌다. 오대산본은 도쿄대학에 기증되었으나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소실되었다. 적상산본은 구(舊)황궁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실록도난사건으로 낙질이 많이 생겼으며, 6·25 때 이것을 북한측에서 가져가 현재 김일성종합대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조선왕조실록은 한국의 역사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사회·법률·외교·군사 및 그 밖의 모든 문화를 연구하는 데 필요한 것이므로, 1929년부터 1932년까지 4년 동안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일부 정족산본)을 원본으로 하여 실록 전체를 사진판으로 30부를 영인하였는데 대부분은 일본으로 가져가고 한국에는 8부만 남았다. 광복 뒤 국사편찬위원회에서 1955년부터 1958년까지 태백산본을 1/8로 축쇄·영인하여 국배판·양장본 48책으로 간행, 이를 국내 도서관은 물론 세계 주요 대학 도서관에 배부하였고, 또 실록의 총색인 1책을 편찬, 출판하여 실록을 이용하는 사람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한편 일본 가쿠슈인대학[學習院大學(학습원대학)]은 실록을 축쇄·영인출판하였다.

실록은 조선시대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가장 기본적인 자료가 되며, 지배층 위주의 관찬기록이라는 한계성이 있기는 하나 여러 방면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있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귀중한 역사기록물이다. 이같이 역사적 가치를 지닌 실록이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한문 이해의 어려움 때문에 접근이 어려웠으나 1968년부터 고전 국역사업의 하나로 민족문화추진회와 세종대왕기념사업회가 나누어 맡아 국역 간행사업을 시작하여 1993년 413권 국역본을 완간하였다. 이는 국학 연구에 가장 큰 숙제를 풀어낸 것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를 넘어 전문 연구자들의 연구를 돕고, 일반인들의 역사의식을 되살리는 데 이바지할 것이라는 데에 실질적인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지만 연구자들에게 자료를 제공한다는 목적에서 역사적 용어를 그대로 쓰고 색인을 붙였으며, 뜻을 풀어쓰기보다는 한자에 토를 달고 한글로 바꿔 놓은 정도여서 일반인이 읽기에는 어려운 전문 연구자용이다.

북한에서는 1970년대초 국가 주도로 국역사업을 시작, 1981년 번역을 완료하고 1990년 전체 401권을 완간하였다.

현재 국보 제151호로 지정된 책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정족산본(鼎足山本) 1181책. 《문종실록》 권11과 《성종실록》 권70·71·80·132·133 이 떨어져 나간 상태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55×30㎝. 국보 제151-1호.
② 태백산본(太白山本) 848책. 《문종실록》 권11만 제외하고 거의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으며, 8·15해방 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가 1985년 3월 국가기록원 부산지원으로 옮겨져 오늘에 이른다. 43×32㎝. 국보 제151-2호.
③ 오대산본(五臺山本) 오대산 사고본의 잔여본 27책. 일제강점기에 일본 도쿄대에 이관되었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거의 대부분 소실되었다. 화를 면한 책들 가운데 30책은 도쿄대학에 보관되어 있으며, 27책만 1932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져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27책은 《중종실록》 중종 2년 5월에서 17년까지의 20책과 《선조실록》 선조 16년 1월에서 26년까지의 실록 잔여분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국보 제151-3호.
④ 기타산엽본(其他散葉本) 잔존분 21책.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실록의 낱장으로 오랫동안 규장각에 파지 상태로 남아 있던 정종~광해군 때까지의 총 558엽의 낱장을 1972년 6월 21책으로 장책한 것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국보 제151-4호.

이상과 같이 《조선왕조실록》의 총 책수는 2077책이며, 1997년 10월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조선왕조실록 일람표

왕대 통칭 원제 편찬년대 권수 책수
1 태조실록 태조강헌대왕실록(太祖康獻大王實錄) 1413(태종 13) 15 3
2 정종실록 공정왕실록(恭靖王實錄) 1426(세종 8) 6 1
3 태종실록 태종공정대왕실록(太宗恭定大王實錄) 1431(세종 13) 36 16
4 세종실록 세종장헌대왕실록(世宗莊憲大王實錄) 1454(단종 2) 163 67
5 문종실록 문종공순대왕실록(文宗恭順大王實錄) 1455(세조 1) 12 6
6 단종실록 노산군일기(魯山君日記) →
단종대왕실록(端宗大王實錄)
1469(예종 1) 14 6
7 세조실록 세조혜장대왕실록(世祖惠莊大王實錄) 1471(성종 2) 49 18
8 예종실록 예종양도대왕실록(睿宗襄悼大王實錄) 1472(성종 3) 8 3
9 성종실록 성종강정대왕실록(成宗康靖大王實錄) 1499(연산군 5) 297 47
10 연산군일기 1509(중종 4) 63 17
11 중종실록 중종공희휘문소무흠인성효대왕실록
(中宗恭僖徽文昭武欽仁誠孝大王實錄)
1550(명종 5) 105 53
12 인종실록 인종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실록
(仁宗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實錄)
1550(명종 5) 2 2
13 명종실록 명종대왕실록(明宗大王實錄) 1571(선조 4) 34 21
14 선조실록 선조소경대왕실록(宣祖昭敬大王實錄) 1616(광해군 8) 221 116
선조수정실록 1657(효종 8) 42 8  
15 광해군일기      
태백산본 1633(인조 11) 187 64    
정족산본 1653(효종 4) 187 40    
16 인조실록 인조대왕실록(仁祖大王實錄) 1653(효종 4) 50 50
17 효종실록 효종대왕실록(孝宗大王實錄) 1661(현종 2) 21 22
18 현종실록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실록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
1677(숙종 3) 22 23
현종개수실록 현종순문숙무경인창효대왕개수실록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改修實錄)
1683(숙종 9) 28 29  
19 숙종실록 숙종현의광륜예성영렬장문헌무경명원효대왕실록
(肅宗顯義光倫睿聖英烈章文憲武敬明元孝大王實錄)
1728(영조 4) 65 73
20 경종실록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실록
(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實錄)
1732(영조 8) 15 7
경종수정실록 경종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수정실록
(景宗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修正實錄)
1781(정조 5) 5 3  
21 영조실록 영종대왕실록(英宗大王實錄) 1781(정조 5) 127 83
22 정조실록 정종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실록
(正宗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實錄)
1805(순조 5) 54 56
23 순조실록 순조연덕현도경인순희문안무정헌경성효대왕실록
(純祖淵德顯道景仁純禧文安武靖憲敬成孝大王實錄)
1838(헌종 4) 34 36
24 헌종실록 헌종경문위무명인철효대왕실록
(憲宗經文緯武明仁哲孝大王實錄)
1851(철종 2) 16 9
25 철종실록 철종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대왕실록
(哲宗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永孝大王實錄)
1865(고종    

본내용은 야후지식을 참고하였습니다.
출처:http://kr.ks.yahoo.com/service/ques_reply/ques_view.html?dnum=AAJ&qnum=6063606&kscookie=1


관련링크

“북관대첩비는 돌아왔다. 이번엔 조선왕조실록이다”
일본 도쿄대에 유배된 조선왕조실록, 돌려받을 수 있나?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02243.html



Posted by 블로그에세이-BlogEssay Dramatiq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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