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박물관'에 해당되는 글 3건

  1. 2011.07.06 가락국-가야국-구야국
  2. 2009.02.23 가야국탐방(3)
  3. 2009.02.19 가야국탐방(1) - 금관가야


가락국-가야국-구야국


배운 역사의 기억을 더듬는다면  한반도 남부지역의  24 소국에서 변한(弁韓)12소국과 진한(辰韓)12소국 중 변한(弁韓)12소국에 속한 현재 김해의 구야국(가락국)은 전기 가야연맹(前期加耶聯盟)의 대표국 이다.

발굴된 고고학 자료들은 김해 박물관, 대성동고분박물관 등에서 볼수 있으며,
1세기에서 4세기로 이어지는  가야지역의 문화 중심은 김해, 부산, 창원을 연결하는 경남 해안 벨트이었고,
그것을 입증하는 유물이 타 지역에 비교 한다면 압도적으로 많다.

이지역의 유물에서 군사장비나 장식류, 생활토기들을 볼때  전기 가야 소국들은 이미 경장한 통치 체제하에서 잘 짜여진 국가형태이었음을 암시한다.

가야 소국들이 연맹을  형성한  시기는 2세기 후반 정도라고 하지만 ,
적어도 4세기 이전에 갖추어진 사실에는 많은 기록에서 동일하게 볼수 있다.

그래서 3세기나 4세기초반에 변한 12국이 가락국(가야국 또는 구야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변한 소국연맹체로 자리잡았고 가락국은 맹주로 활약했음을 유추할수 있다.


당시의 분묘를 발굴한것을 보면  대성동고분군에서 길이가 무려 10미터가 넘는 대형 목곽묘들이 있다.
이것은 강력한 맹주국 가락국의 위상이 대단했음을 인정하는 증거로 본다.

가락국 장수가락국 장수


전투장비를 갖춘 가야무사가  숲을 순찰합니다.
1500년전 가야인의 숨결을 현대에 느껴보는 봉황대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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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 칠산서부동 | 가락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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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사 탐방때 느낀 기분 좋은 경남 김해시의 박물관도우미


김해박물관


나는 김해의 가야사부분 역사유물을 볼려고 날을 받아 작정하고 갔다.
대충 아는 김해의 역사 유적지의 위치상으로 자동차가 더 귀찮을수 있다고 생각해서 시외버스 터미널에 내렸다.

인터넷 지도를 검색해서 터미널에서 제일가깝게 나와 있었던 봉화유적지를 둘러 봤다.
안내인이 없어도 둘러보고 이해하는데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떤사람에게 물어서 도보로 대성고분 박물관에 도착했다.
나는 역사 박물관을 둘러보는데는 나름대로 터득한 방법으로 잘 둘러볼수 있고 무었이 잘되어 있고 무었이 형식적인 치장으로 생색내기 유물전 인지는 잘 안다.

경남과 부산에 산재한 가야사 유물은 거의 대동소이 하나 약간식 특색은 있다.
그래도 김해 유적의 분량은 지금까지 모두 수량이나 질에서 만만찮다.

역사 박물관은 우리의 찬란했던 역사나,문화유물이나,또는 왜곡될수도 있는 귀중한 역사 바로알기를 위해서 국민누구나 접근이 쉽고 제한 하는 것 들이 없을때 그 효과가 극대화 되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리라고 항상 생각하고 어떤때는 아무 힘없는 안내인에게 나무라기 까지했었는데,..

김해는 발전된 현대 박물관의 매너를 안내인들의 태도에서 느낄수 있었다.
관람객이 들어오든 말든 하는 곳도 있는데 여기서는 벌떡일어나서(안일어 나고 멀끄미처다봐도 나쁜것은 아님) 무었을 안내하면 되겠는가를 물으면서 보여주는 친절한 행동과 말씨에서 첨부터 기분이 좋다.

그 사람들이 공무원이든 아니든 상관 없다,내가 말 할려고 하는것은 김해를 이야기 하는것이기 때문이다.
가장 효과적으로 김해 가야사 유물을 다 볼려고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초~중년 아주머니 직원의 친절한 안내와 손수 메모를 해주는 수고를 함으로서 그날(지난주)가야사 유물을 시간적으로 시행착오 없이 잘 둘러 봤으며 오늘 이글을 쓴다.
그중에서 산꼭대기 부분은 다음 계획때 가기로 하고 그날은 보류 했었다.

아래는 내가 가는 방향에서 적절한 순서를 쓴 그분의 메모지 사진이다.물론 그분은 이 메모지 이외에도 많은 말을 내게 해 줬다.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물론 이 이외에도 박물관 입장료 해봐야 부산의 500원 받는것은 상징적인 의미이지 입장료가 비싸다곤 생각지 않는다.

김해는 그냥 Free 라고 적혀있다.
이 작은 돈 도 안받는다고 입구에 적혀있는것은 그만큼 리미트가 하나더 없어 진것 임으로 기분좋다.
줄서고 표사고 입장권 체킹하는 제한을 없앴다는 의미로 본다.
작년에 답사했던 어느 박물관은  몇천원을 받는곳도 있었고 사진촬영을 금지하는 곳 도 아직 있다.

카메라 성능이 좋기 때문에 후래쉬 없이도 얼마든지 찍을수 있는 우리 역사 유물을 제발로 공부 하겠다고 찾아오는 사람에게 공책에 그림으로 그리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고 사진은 찍지 말라고 하는 곳도 여기 김해 말고는 아직은 있었다.

구태 행정 편의주의에서 완전히 탈바꿈한 선진 김해시를 잠간동안 부러워 했다.
내가 그날 달랑 메모지 하나 받고 찬사를 보내는 것은 아니다.

이후 김해의 많은 유적지를 둘러보는 동안 만나는 모든 종사자들의 웃음이 만면한 친절과 아무 관계가 없는 능 주변의 어느 통장(뒤에안사실)님까지도 멀 하나 더 말해주고 싶어서 애쓰는 모습을 볼때 자기고장을 자랑하는데 애쓰는 모습 으로서 아름답기 그지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스마일 김해 바이러스가 퍼젓는진 몰라도 마지막 길을 물은 롯데캐슬 아래의 어느 카센타 종업원 까지도 길가에 나와서 손짖까지 하면서 안내 하여 주었다.

지자체의 병페도 많다.
그러나 오늘 김해를 본 후에 지자체가 독창적으로 이만큼 외지 인에게 좋게 보일수도 있고 거국적 효과로 어떤 사안이 처리 될 수도 있구나 하고 오늘날 까지 가지고 있던 나의 편견을 부끄러워 한다.

김해 가야사는 역사적으로 우리가 일본과 맞물려 있는 체인의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 포함된 곳이며 우리 후학들은 삼국시대 언저리에 결코 작지않은 제국을 이루었다고 생각하는 가야제국에 대해서 알고자 할때에 행정이 제공할수 있는 모든 제한을 없애야 한다고 말하곤 했는데 여기 김해는 실천되고 있지 않는가...

우리나라의 모든 역사는 사실을 말하는데 어디 중요하지 않고 더 중요한것이 있겠는가 마는 우리의 국민들이 스스로 관심가지고 역사의 현장에 까지 와서 머뭇 거리지 말게 해 줌으로서 먼 훗날 무지 때문에 "어찌 이런일이 일러나는가" 하고 후회 하지 않게 해 주는것은 그 관련 행정관서에서 부터 전 관련분들의 의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오늘 김해의 가야사 탑방을 하고 그 종사자 분들의 친절에 감사 드리며 이 글을 쓴다.

가야국탐방 김해박물관



가야국탐방바로가기-1:
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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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재미로 하는 역사탐방 

김해역사 유적 벨트를 탐방한다면 자동차를 가지고 가는것 보다는 도보로 하루를 할애 한다면 김해 시외버스 주차장에서 봉황동을 시작으로 김해 읍성내 옹기종기 분포해 있는 유적 ,박물관,가상모형복원품,성루,등을 살펴볼수 있습니다.
 

가야국은 지금까지 우리가 역사에서 후학들에게 말하고 있었던 부족 국가의 형태의 소국이 아니라고 생각하며, 우리의 역사가 3국시대로 국한하는 내용을 수정한다면 그 현장에 가야 제국의 모습이뚜렸이 서있음을 알수 있다.

실제로 역사의 유물과 그 규모와 병마 제구의 질로 볼때 신라보다 우세한부분도 있고 대등한 국가라고 생각하며 찬란한 철기 문화는 신라로 일부 넘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가야국 말기에  신라의 외교로 고구려의 직접적이고 강력한 개입때문에 사라진 제국 가야는 이제라도 우리는 역사에서 사국시대로 당당히 말할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고령으로 부터 복천동에서 다시 김해로 오면서 역사가 쓰여진 미스테리에 휘말리고있다.

강력한 제국 가야가 왜 3국시대 언저리에서 조금 언급되고 있을뿐인가...
가야가 멸망하면서 우수한 인력이 대거 일본으로 유입된 흔적은 많다.
또 그 기능이 신라에 전수된 흔적도 많다.
더 이상한것은  동이족의 지표인 갑골의 원류는 발해이고 그 흔적은  김해지역에서 충분히 발굴되었다.
발해거주부근에 집중된 갑골문자가 경상도 전라도 지역에 분포 하는가에 관심이간다 .

참고로
이형구 선문대 교수의 글에서는 발해연안에서 발굴된 갑골문자는 최고 시기가
BC 3500~BC 3000년것이며 이는 중국 최고로 주장하는 허베이(河北)·허난(河南)·산둥(山東)반도의 룽산문화(龍山文化·BC 2500~BC 2000년)보다 1000년 이 더 빠르다고 한다.

가야역사 베일의 뒤에는 혹시 제국의 역사가 있을것인가.
패총은A.D 1-5 세기에 형성된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재미로 하는 역사 매니어는 틀에맞는 역사가 가공되길 즐거워 하면서 잠시 생각해본다.

"금관가야"


김해 봉황동 유적은 경남 김해시
봉황동(발굴당시 김해읍 회현리(會峴里))에 있는 유적으로서 패총유적이다.
발굴된 조개더미에서 수많은 유적이 나옴으로서 김해패총(金海貝塚)으로 불리고 있다.

"금관가야"


"금관가야"


최초 발굴은 1907년(융희1년) 동양 사학자인 교토제국대학교수인 이마니시(今西龍)가 1920년과 1934~1935년에 걸쳐 매장지를 조사 발굴하면서 조개더미유적임이 드러난곳이다.(위키백과 부분인용)

2001년부터 김해시에서 경남발전연구원을 통해 실시해 온 봉황동유적지에서는 항만접안시설이 존재할 개연성을 포함하고 있다고 하며 가야국의 배를 찾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하다.

"금관가야"



"금관가야"



"금관가야"



현재 김해시가 금관가야국의 중심지일뿐만 아니라 해상교역국임을 암시하는 굴립주건물지가 다량 출토되었다.

봉황동 유적지와 대성동 고분박물관 국립김해박물관을 둘어본다면 유물들과 역사적 사료를 파악할 수 있다.

봉황동의 발굴품들은 붉은 토기(赤色土器)·회색 토기·신라 토기의 파편과 철부(鐵斧)·철도자(鐵刀子, 쇠 손칼) 및 특히 왕망 시대의 화천(貨泉) 등도 발견되어 철기 시대의 패총임이 증명된곳이다.

그리고 상식석관(箱式石棺)·옹관(甕棺)·세형동검(細形銅劍)·마제석촉(磨製石鏃) 등과 금석 병용기 말부터 ~ 삼국 고분기(三國古墳期)의 것으로 추측하고 있는 곳이다.
삼국유사에서는 5가야조를 아라가야(阿羅伽耶) · 고령가야(古寧伽耶), 대가야(大伽耶),성산가야(星山伽耶),소가야(小伽耶),금관가야(金官伽耶),비화가야(非火伽耶)라고 하는데 김해지역은 금관가야 지역이다.
또 삼국사기 지리지에는 고령가야,금관국,아시라국(阿尸良國),대가야국(大加耶國) 으로 적혀있다.

이하 <출처:김해시청>

김해 봉황동유적지는 봉황대라고 불리는 구릉지와 그 주변 지역을 포함한 대규모 생활.생산유적으로서, 1920년 우리나라 최초의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로 유명한 회현리 패총과 합쳐진 이름이다.
이 일대는 청동기시대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한 이후 생산과 주거의 거점지역이었으며, 이후 대규모의 주거지, 고상건물지, 방어시설, 한국 최대 깊이의 패총 등이 발굴되는 점 등으로 보아 금관가야 지배층 집단의 중심 거주지역으로 발전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가야"


仇衡王 [ 구형왕 ]
금관 가야의 마지막 임금. 겸지왕(鉗知王)의 아들. 23대 신라(新羅) 법흥왕(法興王) 19(532)년 신라(新羅)의 공격(攻擊)을 받고 항복(降伏)하였음. 법흥왕(法興王)에게서 상등(上等)의 벼슬과 가야국(伽倻國)을 식읍(食邑)으로 받았음

가야국탐방바로가기-1:금관가야(金官伽耶)(1)김해 봉황동 유적
가야국탐방바로가기-2:금관가야(金官伽耶)(2)기록된 가야역사
가야국탐방바로가기-3:가야국탐방(3)김해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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