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장군'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3.06.30 죽어서도 바다를 지키는 최영장군
  2. 2008.07.30 조선왕조 왕위표와 이성계의 건국

부산에 살아 있는 최영장군

황금을 돌같이 보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떠난 최영장군은 영원히 떠날 수 없어 아직도 부산 앞 바다에서 나라를 지키고 있습니다.

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 최영장군은 부산사람은 아니지만 그의 사당은  부산의 감만동,영도,수영동,자성대에 있으며 이부근 사람들은 수호신처럼 장군의 영을 모시면서 신앙으로 승화되어 사당에 제사를 올리고 있으며 자성대 산책로 위에 있는 그분의 작은 사당 앞에 서는 지나는 사람들이 합장하며 예를 올리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주:백수최만호(白首崔萬戶)- 만호는 큰 벼슬은 아니지만 만호벼슬로 크게 승리해서 왜군을 벌벌 떨게 한 홍산 전투의 위상 때문에 백수 최만호를 호칭하는 것입니다.)


도심 속의 작은 동산 자성대의 짙은 수림 속에 어쩌면 초라하게 어쩌면 검소하게 보이는 작은 그분의 비각(사당)은 왜성에 모셔지고 있어서 저세상에서도 왜군을 무찌르는지 모릅니다. 

자성대는 임진왜란 최초의 전투를 한 부산진성 지성이며 왜군이 조선을 점령하고 왜성으로 덧씌워 지어서 지금은 큰틀의 왜성만 남아있습니다.  


많은 복원으로 우리의 옛모습을 재현하고 있는 자성대이지만 돌로 쌓은 성곽은 전형적인 왜성의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역사는 언제 까지나 유구히 흐르지만 지나간 세월들 속에서 새롭게 살아나는 그분의 영혼은 부산을 결코 떠날 수 없습니다.


최영장군 사당(비각)죽어서도 바다를 지키는 최영장군


조선시대 4대수군절도사영이 남해안에 집중되어 있었으며 그만큼 남해바다의 국방이 중요하단 증거이며 그중에서 좌수영수군절도사영이 있던 곳이 부산이며 지금도 대한해군의 부산해군작전사령부가 있으며 이순신급 대한민국 구축함 최영함이 그분의 이름을 달고 아직도 부산 앞 바다를 누비고 있습니다.

최영장군은 일편단심 구국정신으로 한평생을 살다 육신은 떠났지만 그의 우국충혼은 영원히 우리의 가슴속에 남아있으며 가끔씩은 자성대 산책로에서 만나고 위풍도 당당하게 물살을 가르며 오륙도 앞바다를 지나가는 우리구축함 최영함의 펄럭이는 깃발에서도 만나며,  만리 타국의 아덴만 에서도 최영장군은 전광석화같은 전과를 올리면서 조국의 깃발아래 영원히 살아 있습니다.

숱한 오류를 남기며 국민을 실망시키는 부끄러운 정치적 결과는 후세에 역사의 심판을 받겠지만 600년도 더된 최영장군은 오늘도 되살아나고 있습니다.

한여름 짙은 숲속을 산책하다 만난 최영장군의 검소하게 작은 사당 앞 마당에서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면서 국내 외를 막론하고 바다 때문에 신경 쓰이는 요새 최영장군의 우국충심이 그리워 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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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주 최(崔)씨 영(瑩)은 고려 충숙왕3년 1316년에 태어나서 1388년에 72세의 나이로 떠난 고려 말기의 정치인이며 장군이다.

고려때 무관정치가 성했을 때 임으로 최영은 무관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긴 정치인이지만 후세인들은 최영을  정치적 벼슬 직함 보다는 무관 최영장군으로 부르고 있다. 최영(崔瑩)의 시호는 무민(武愍)이며 고려 조정의 중대광판문하사동원부원군(重大匡判門下事東原府院君) 최원직(崔元直)의 아들이다.

사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는 교훈은 최원직(崔元直)이 아들에게 당부한 말이며 최영은 평생 그 말을 되새기며 나라에 충성하고 검소한 사람으로 산 것이다.

 

유교 사대부와 함께 한 이성계와 대립했으며 명나라가 서북면을 요구하여 벌어진 요동정벌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었으나 위화도 회군 이후 이성계의 반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는 군관으로 출사하여 우달치에 임명된 뒤 관직은 육도 도순찰사, 양광, 전라도 왜적 체복사 등을 거쳐 문하시중에 이르렀다.

약력:1374년에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목호(牧胡)의 난을 진압, 1376년(우왕 2)에 왜구의 침략 때 육군으로 논산군 연산의 개태사(開泰寺)로 올라오는 왜구를 홍산(鴻山)에서 대승.- 철원 부원군(鐵原府院君)에 봉작됨, 왜구와 홍건적을 여러번 격퇴한후 안사공신(安社功臣)에 책록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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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로 하는 조선역사의 재고찰
조선은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총 519년동안 존재했던 나라임.

조선왕조

1392년에서 1910년까지  총 519년동안 존재했던 나라임.
때로는 근세조선,이씨조선 이라고도 함.
산군 해군
#종 은 나라를 덕으로 안전하게 유지한 임금에게 붙인다.
#조는 큰공을 나라에 보탠임금을 말한다.
#군은 제대로 왕의 책무를 다하지 몯해 하야한 임금을 말한다.



조선 왕위표 [ 1392년 7월 17일~ 1910년 8월 ]

1. 태 조 ( 1392. 7. 17~ 1398. 9. ) - 2. 정 종 ( 1398. 9 ~ 1400. 11 )
- 3. 태 종 ( 1400. 11~ 1423. 5  )- 4.  세 종 ( 1418~ 1450. 2. 17 )
-5. 문 종 ( 1450. 2. 17 ~ 1452. 5 ) - 6. 단 종 ( 1452. 5 ~ 1455)-

7. 세 조 ( 1455~ 1468. 9 )-  8. 예 종 ( 1468. 9~ 1469. 11)
-9. 성 종 ( 1469. 11~ 1494)  - 10. 연산군 ( 1494~ 1506. 10?)-11. 중 종 ( 1506. 10~ 1544. 11) - 12. 인 종 ( 1544. 11~ 1545. 7. 1)-13. 명 종 ( 1545. 7. 1~ 1567) - 14. 선 조( 1567~ 1608)-15. 광해군( 1608~1623)- 16. 인 조 ( 1623~ 1649. 5?)

17.효 종( 1649~ 1659. 5. 5 ) - 18. 현 종 ( 1659. 5. 5~ 1674. 8 )
-19. 숙 종( 1674. 8~ 1720 ) - 20. 경 종 ( 1720~ 1724)-21. 영조( 1724~ 1776. 3 ) - 22. 정 조 ( 1776. 3~ 1800. 12?)-

23. 순 조( 1800. 12?~ 1834) - 24. 헌 종( 1834~ 1849)
-25. 철 종( 1849~ 1863. 12. 8 )- 26. 고 종( 1863. 12.~ 1907. 7 )-

27. 순 종( 1907. 7~ 1910. 8 )


조선건국의 배경

고려말 이성계는 최영과 더불어 나라 최고의 무장이었다.

당시 정세 는 해군력이 쇠퇴하고 고려는 일본 해적 왜구가 해상권을 이용해서 배를 타고 전국해안에 수시로 출몰해서조선을 약탈하고 있었으며 그 세력이 강해서 중국 해안선을 따라서도 약탈을 하여 해안주민들을 괴롭히고 있었으나 조정에서 이들을 막지몯하고 있었다.

이때 최영과 이성계가 왜구를 물리치면서 군권을 장악하고 무인이 득세하게 된다.

이무렵 1388년 원나라를 무너뜨린 명나라가 요동을 접수 관리 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해 오고 고려의 우왕은 이성계에게 군사를 주어 요동을 정벌할 것을 명한다.
(사실 정벌이 아니고 원래 고려땅을 방치하고 있다가 명이 공식적으로 편입하겠다고 하니까 되찾을려고 한것이며 고려에서는 중원의 나라를 겁내지 않았다)

이성계는 명령을 받아 출정을 하지만 평소 대륙을 원하지도 않았고 전쟁하기도 싫어했던 이성계는 압록강 위화도에서 역심이 생겨 좌군도 통사 조민수와 함께 군대를 돌리고 병력없는 텅빈 왕실에서 최영장군과 왕실을 몰아내고 고려를 접수하여 조선을 건국한다.
 
당시 고려 귀족들은 큰토지를 관리하며 호화롭게 살면서 소국가를 형성할만큼 큰세력으로 살면서 정치를 어지럽히고 있던때에 개혁 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한다.

혁명하는 이성계는 개혁세력과 손잡고 회군함으로서
중국을 지배하던 원나라의 세력이 없어지고 명이 들어서는 때에  옛 조상들의땅 요동을 지배할수 있는 찬스를 버리게 된다.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하고 왕성했던 인천에서의 외국무역을 차단하게된다.
고려 왕족들이 무역을 왕성하게 했던것을 완전히 봉쇄함으로서 조선은 대문을 굳게 닫는 쇄국국가로 바뀌게된다.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고려의 정책과는 완전히다른 노선으로 바뀌고 수비국가로 정책이 바뀌면서 도읍지를 안전한 남쪽으로 옮기게된다.

이성계는 국가정책을 쇄국으로 하면서 해상을 포기하여 국가의 조세품을 실은 자국배가 왜구때문에 조정까지 운반을 몯해서 왕실의 살림이 가나할정도 였다.

안으로는 굳게 문을 잠구고 이웃 강국에게는 대국으로 섬기면서 안위를 보장받는 이른바 사대주의를 시작하게 된다.
이성계는 쇄국정책과 사대주의를 병행함으로서 명나라가 망하지 않는한 국가가 안전할것으로 생각하게되고 그의 혁명을 반석위에 올리는데는 이 정책이 일조했다고 본다.

이야기거리:
이성계가 무학대사한테서 점지받은 부평에 도음을 정할려고 부평100개봉우리에 산신제를 지내고 백관과 더불어 도음을 정할려하자 한개의 봉우리가 너무나 원통해서 폭삭 주저앉아 버렸는데 그 봉우리 있던자리가 고개가 되어 지금은 원통이(만월산-동암역 앞산-처음에는 가장큰 주봉이었다고함)고개이다.

이성계는 완전히 방어에 안전한 100개봉우리가 둘러친 부평이 99개의 봉우리로 바뀐걸보고 한양으로 다시 도읍지를 바꾸게 된다.

 

조선은 1392년 태조 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해 출범해서 일본 제국주의 강압에 의한 한일합방으로 1910년 멸망했다.

그 동안 정식으로  왕위에 즉위했던 사람은 모두 27명이고 왕위에 즉위하지는 않았지만 죽은 후 왕에  추존된 사람은 모두 9명이다.

왕위에 있다가 제대로 하지몯하고 중도 하차한 왕이 둘이다.

조선시대에는 나라를 세운 군주를 즉 창업군주나 중흥군주에게 '조'라는 묘호를 부여했다.

왕위의 정통성에 문제가없이 계승한 군주에게는 '종'이란 묘호를 올린다. 
묘호란 조선시대에서 왕이 묻힌 무덤을 종묘라하고 종묘에서 제사를 드릴때 그 종묘에 봉안하는 위패의 이름이 곧 묘호다.

해서 우리가 사용하는 세종이나 정조 등 왕의 명칭은 그 왕이 죽은  후에 후학이나 종친 사직에서 부여한 묘호의 이름인 것이다.

조선조에서 처음에'종'이었다가 후에 '조'로 바뀐 왕은 영조(영종), 정조(정종),순조(순종)가 있으며 고종처럼 자기맘대로 스스로 황제가 된 경우도 있다.

왕자에게는 '군'이란 칭호를 주는고,정식 왕비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대군',빈(후궁)에게서 태어난 왕자는 군으로 호칭한다.
고로 연산군과 광해군의 경우는 왕에서 쫓겨난 서자왕자로 강등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딸의 경우 정식 왕비 소생에게는 '공주'를, 후궁 소생에게는 '옹주'라는 칭호를 주었다.
왕이사망한 후 편찬되는 재임시절의 공식 기록을 담은 실록은
폐위된 임금은 정식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에서 실록 대신 일기라고 이름을 붙인다.
해서 조선왕조실록에는 연산군일기, 광해군일기 등 '실록'이 아닌 '일기'가 두 편 포함되어 있다.오늘날 단종으로 불리는 조선조 6대 왕은
세조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노산군'으로 강등되었다가 죽은지 2백년도 더 지난 숙종 24년(1698)에야 단종으로 복원되웠고, 실록 명도  '노산군일기'에서 '단종대왕실록'으로 바뀌었다

(이때 고려조 충신 진주정씨의 정분(당시 우의정)님도 복권되었다 - 현재 정분님(애일당)의 묘소는 진주 비봉산에 있으며 그분의 아버지,그분의 할아버지 와 함께 3대묘 고분군으로 문화재로 봉안되고 있다 - 관리 세덕사 ).
** 조선이 건국하면서 역적으로 처형했던 인물을 조선이 다시 충신으로 봉안한 인물임 **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이러한 호칭에서도 역사의 준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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