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부산동래 금강공원내에 있는 역사유적.
부산과역시지정기념물 제 13호
1592년 임진년 선조 25년 오전에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수많은 군선과 함께 부산진첨사 정발이 지키고 있던 부산진성을 공격하고 함락시킨다.
이미 소식을 들은 동래부사 송상현은 죽기를 각오하고 전투준비에 임했다.
인근 지원군도 속속 도착하고 전투준비를 했으나 워낙 중과부족으로 어려운 전쟁임을 알지만 동래성의 민관군은 일심 단결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여세를 몰아 고니시 유키나가는 동래성에 도착하자 성 앞에서 병력을 과시하며 戰則戰矣 不戰則假道 -전즉전의 부전즉가도- 즉 "싸워 보고싶다면 싸우고 싸우기싫다면 길을 비켜라" 라는 오만한 글을 전투를 하기전에 송상현에게 깃발에 달아서 보여주었다.
자기들이 남의 땅에서 지나갈테니 길을 비키라는 오만방자한 소리인 것이다.
송상현은 왜군이 한반도에서 저지를 노략질을 잘 알고 부산 동래성을 죽기로 사수할결심을 하며 戰死易假道難 - 전사이 가도난- 즉 "죽기는 쉬워도 길을 열기는 어렵다"라는 글귀를 내 걸었다.
곧 양군의 전투가 벌어지는데 이것이 동래성 전투이다 .
동래성전투는 초반에는 송상현이 준비를 잘 해서 고니시 유키나가가 쉽게 점렴하지 못하고 패주 후퇴했다가 병력을 재투입해서 전투가 계속되고 송상현은 극심한 중과부적으로 궁지에 몰리며 백성까지 힘을 합쳐 돌맹이를 던지는 지경까지 가는 충절과 함께 최후를 마친다.
이로서 임진년 왜구들의 침략으로 시작된 암담했던 임진왜란(壬辰倭亂)의 서막이 시작된것이다.
송상현은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알고 부채에있는 자신의 아버지인 사헌부 감찰 송흥복에게 편지를 써 보내고 조복을 갈아입고 임금이 있는 북쪽을 향해서 북향사배를 올린다.
동래성은 함락되고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조선장수 송상현에게 크게 감동하며 적장을 자신의 가족처럼 예를 다해서 극진한 수준의 장례식을 치루었다.
부하들에게는 송상현의 충직함을 본받으라고 훈시한다.
송상현은 사후 이조판서 찬성으로 추증되었으며 그분의 영구는 현재 동래 안락서원(安樂書院)과 충렬사에 모셔저서 제향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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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관군은 말할것도 없고 이름없는 백성들이 의연하게 일어나 동래읍성을 지키려는 전투에서 수많은 순사(殉死)자를 내는데 이 때 순사(殉死)한 성민들의 유해를 거두어 만든 무덤을 본래장소에서 몇번 옮겨 현재의 장소 동래금강원에 안치한곳이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즉 부산시(도)기념물 제13호 이다.
기록에 의하면 1731년 영조 7년에 동래부사 정언섭이 허물어진 동래읍성을 수축하다 임진왜란 격전지 남문터(지금의 수안로타리)에서 당시 전사한 무명용사의 유골을 발견하고 이 유해를 거두어 함에 안치해서 삼성대(三姓臺)의 서쪽 산기슭 현재 내성중학교 부근에 여섯개의 무덤으로 만들고 안장했다.
그리고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이라는 비석을 세웠다.
관에서는 소요되는 제전(祭田)을 지급하여 동래향교에 맡겨서 매년 추석에 유생들이 제사를 모셨다.
그리고 전쟁발발일을 순절일로 하고 제사를 모신다.
일제말기에 토지개간으로 무덤이 파괴되고 현재 복천박물관 부근 복천동 뒷산 영보단(永報壇)부근으로 이장하였다가 1974년 금강공원 내 현재의 자리에 한개의 무덤으로 만들어 봉안하고 있다.
현재 동래구와 동래문화원에서 이 분들이 순절하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구민들의 정성으로 제향을 일체를 봉행한다.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
임진동래의총(壬辰東萊義塚).