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이야기/가야국-탐방

대가야의 위상을 보여주는 지산리 고분군

Dramatique 2018. 9. 12. 16:28

대가야의 고장 고령박물관과 지산리 고분 탐방 

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탐방. 

경북고령군 고령읍 대가야로 1203 지산리460
전화 054-950-6071~3

가야국은 어떤나라인가?

가야국의 시조,수도,존재기간(加耶國의 始祖와 首都)

562년까지 낙동강을 끼고 그 서안 지역에 있던 여러 소규모 정치세력이나 작은 국가형태의 정치세력들을 지칭해서 가야국 이라고 합니다.

가야는 문헌기록에 따라 가야(加耶,伽耶,伽倻)·가라(加羅),가량(加良),가락(駕洛),구야(狗邪·拘邪),임나(任那) 등 여러 명칭으로 불리고잇습니다.
각 표기들이 지니는 의미는 한자어대로만 풀이해서는 안될것이며 차이 또한 확실히 모르지만 가장 빠른 시기의 기록인 삼국지에 구야국으로 기록된것이 적용되는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광개토왕릉비에 가라(加羅)로 되어 있고 중국과의 공식적인 통교사실을 기록한 남제서에 加羅로 표기된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당시 사용되던 공식 국명은 ‘가야’가 아니라 ‘가라’였을 것으로 추정하기도 합니다. 


3세기 중반의 상황을 전하는 삼국지에는 가야란 명칭이 쓰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라가야(함안),고녕가야(함녕),대가야(고령),성산가야(성주),소가야(고성),금관가야(김해),비화가야(창녕) 등의 명칭이 나옵니다. 

삼국유사는 주로 가야(伽耶)로, 삼국사기는 가야(加耶) 또는 가라(加羅)로 쓰고 있습니다.
삼국사기에 따라 가야(加耶)로 통일해서 사용하기로 하는 추세입니다.

가야에 관한 역사책은 고려 문종 때 금관주지사(金官州知事:김해지역에 파견된 지방관)를 지낸 인물이 저술한 가락국기가 있었다고 하지만 원본은 없으며 이 책에서 발췌해서 정리한것으로 알려진 가락국기(駕洛國記)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야는 일찍이 철기문화와 벼농사가 발달해서 풍부한 철을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한것입니다.

특히 이 시대 가야 문화는 일본의 발전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나타납니다.
가야지역에서 발굴된 유물들로 당시 가야의 국력과 왕권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게됩니다.

안타갑게도 가야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 삼국과 다르게 많은 가야가 하나로 통일되지못하고 지역별로 분립된 상태로 지속하다가 멸망하게됩니다.

가야 소국들 전체가 신라와 백제로 모두 흡수되거나 멸망 됩니다.

경북고령군 고령읍 대가야로 1203 지산리460 전화 054-950-6071~3

김해, 고령, 함안, 고성 지역의 정치세력들은 각각 금관가야, 대가야, 아라가야, 소가야로 지역 연맹체로 지속되지만 통일 국가로 결합하지못한것입니다.

오직 대가야는 5세기 후반 6세기 전반 까지 가장 강력한 전성기를 구가하고 고대국가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세력으로 발전했다고 알려집니다.



대가야(大加耶)는 어떤나라인가?

경 북 고령을 도읍으로 하고 있던 나라로 56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했습니다.
삼국사기의 기록에는 시조 이진아시왕에서 도설지왕(道設智王)까지 16대 520년간 존속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동국여지승람 고령현조에 인용된 최치원의 석리정전(釋利貞傳)에 대가야 시조설화가 전하는것입니다.

현재 고령의 대가야가 가야권에서 가장 강대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자료로 봅니다.
또 대가야국 시조를 수로왕과 형제 사이로 묘사하는데 이는 3세기 중엽까지는 김해의 금관국이 가장 강력했던터라 이를 대가야가 계승했다는 정통성을 주장 하는것으로도 생각됩니다.

5세기 후반에 대가야는 현재의 고령, 합천,거창,함양,남원,하동,구례, 진안 등 까지를 영토로 하는 큰 나라로 발전한 것입니다.

중국의 남제서 동이전 가라국조에 479년 가라국왕(可羅國王) 하지(荷知)가 남제에 사신을 보냈다는 기사가 나온다고합니다.
그렇다면 당시 대가야는 중국과 교류를 하는 국가적인 형태의 세력이라는것을 알 수있습니다.

481년 고구려가 신라 북쪽에 침입했을 때 대가야가 백제군과 함께 출병해서 고구려군을 격파한 내용도잇습니다.
그러나 가야권 전체를 통합하지는 못하고 562년 멸망하게됩니다.



가야국 지도

대가야

지산리고분


◙.대가야 원문

고대사서 삼국사기(三國史記),삼국유사(三國遺事)에 가야국(加耶國)이 언급되지만 ,많은 가야국 중에서 시조(始祖)가 명확히 이름으로  기록된 가야국은 금관가야(金官加耶),고령가야(高靈加耶) 두개 뿐이다.

현재 행정구역 고령군은 대가야국의 본역지이다.
시조 이진아시왕(다른이름:내진주지) 을 시작으로 도설지왕까지 모두 16세 520년의 역사를 가진 강력한 남부지역의 일국이다.
진흥왕이 침공하여 멸망시키기까지 가야국으로서는 신라를 위태롭게하며 가장 오랫동안 남아있었던 가장 강력한 가야국이었다.

대가야는 2현의 지방으로 구성되고 현재행정구역명 합천군 야로면은 야로현이었으며  그때 적화현인이었고,
신부현은 원래는 가시혜현인데 경덕왕 때 지명을 고친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야로는 지금 그대로임으로 정확히 알수 있지만 신부현은 사학자들의 엇갈린 해석은 있어도 현재지역을 정확히 추정할수 없는 형편이다.

◙.금관가야.
김해의 작은수도는 옛날의 금관국(혹은 가락국,가야라고함)이다. 

시조는 수로왕이며 10대 구해왕이 신라 법흥왕(19년,532년)에게 백성을 데리고 항복해서 신라와 병합됨.
이후 금관가야는 금관군으로 개칭되었다.
문무왕 20년에는 소수도로 격상되고  경덕왕 때는 김해경으로 개칭되며 이후 지금의 금주로 불린다.

고녕가야.

고녕군은 본래 고녕가야국이다 라고 기록된바.
이를 신라가 정복해서 고동람군(또는 고릉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했다.
지금의 행정구역 명칭은 함녕군이다.
당시 3현으로 구성된 고녕가야이었는데,
@가해현을 가선현으로, 가해현인데, 경덕왕 때 이름을 고쳤고 이후 가은현임.
@관현(또는 관문현)을 관산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함, 이후 문경현임.
@호측현은 호계현으로 경덕왕이 개칭하고 이후 그대로 사용함.

.화왕군
비자화군(비사벌)은 화왕군이었는데  진흥왕 16년(555)에 주로 바꾸고 이름을 하주(下州)라 했는데,
경덕왕 26년(565년)에 주를 철폐하고 개칭하며 지금의 창녕군이다.
추량화현(삼량화)은 현효현으로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현풍현이며 현재행정구역 현풍임.

.고성군

고성군은 고자군(古自郡)이었는데 경덕왕 때 개칭되었고 이후 그대로 쓰며 3현의 행정구역이었다.
문화량현(蚊火良縣)은 지금의 어디인지 모른다.

사수현은 본래 사물현이었고 ,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사주(泗州)이다.
.상선현은 본래 일선현이었고 , 경덕왕 때 개칭되었으며 이후 영선현이다.
.함안군은 법흥왕이 대군을 일으켜 아시라국(阿尸良國)(阿那加耶)을 멸망시키고 그곳을 군으로 만들었는데  경덕왕이 개칭함. 이후 그대로 쓴다. 2현의 행정구역이었다.
. 현무현은 본래 소삼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함.이후 소삼부곡이다.
.의녕현은 본래 장함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그대로 쓴다.

.성산군은 본래 일리군(一利郡)(里山郡)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가리현임. 4현의 행정구역.
.수동현은 본래 사동화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짐역 미상임.
.계자현은 본래 대목현인데 경덕돵 때 개칭 이후 약목현임
.신안현은 본래 본피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경산부임
.도산현은 본래 적산현인데 경덕왕 때 개칭 이후 지역 미상임.

아라가야("羅"를 "耶"로 쓰기도 함. 지금의 함안),
고령가야(지금의 함녕).
대가야(지금의 고령),
성산가야(지금의 경산. 혹은 벽진이라고도 함),
소가야(지금의 고성).

주: "태조 천복 5년 경자년에 5가야의 이름을 고쳤는데,
첫째 금관(김해부가 되었다),
둘째 고령(가리현이 되었다),
셋째 비화(지금의 창녕인데 아마 고령의 잘못인 듯 싶다),
넷째 아라 가야
다섯째 성산(혹은 벽진가야)이다.

가락기에서 ,
자색 끈 한 가닥이 하늘에서 내려와 6개의 둥근 알을 내렸는데, 5개는 각 읍으로 돌아가고 ,
하나는 이 성에 있게 되었다고 했고.
그중 하나가 수로왕이 되고 나머지 5개는 각기 5가야의 군주가 되었다고 했는데,

금관가야는 이 5의 숫자에 계산하지 않은 것 이지요.
그런데 가끔 사해에서 금관가야 까지 그 숫자에 더해서 넣고 창녕가야 까지 기록한것은 실수 한 것으로 봄.




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


지산리고분군


■  지산동고분군(池山洞古墳群)이란?

지산동고분군은 경상북도 고령군 고령읍 지산동 일대에 분포하는 거대한 무덤들의 집합체를 말합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읍을 감싸는 주산성(主山城)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능선과 가지 능선에 걸쳐 넓게 퍼져 있습니다. 주산 남쪽으로 뻗은 주능선 위, 대가야의 왕도였던 고령읍을 한 눈에 내려볼 수 있는 위치에 크고 작은 고분 수백 기가 남아있습니다. 이 고분군은 고령뿐만 아니라 가야지역 전체에서도 가장 최대 규모의 고분군으로써 사적 70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에 대한 첫 발굴조사는 1906년 세키노(關野貞)가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구로이타(黑板勝美), 이마니시(今西龍), 사이토(齊忠) 등의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에 참여했습니다. 그 후 1976년 고령군 공보실에 의해 이루어진 사적 정화작업 이후 외형이 확실하고 비교적 큰 고분에 한해 일련번호를 매겼습니다.
이 가운데 44·45호분은 1977년 경북대학교와 계명대학교의 합동발굴조사단이 발굴, 조사를 했고, 32·35호분은 1978년에 계명대학교에서 조사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이 유명해진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나라에서 최초로 발굴된 대형 순장묘인 44분과 45호분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입니다. 묘제상 중요한 자료인 이들 순장묘가 발굴됨으로써 한국고대사에서 문헌상에 단편적으로 보이는 순장 기록에 대한 실체가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44호분에서는 30여 명 이상의 순장자가 묻혀 있어 당시 발굴에 참여했던 이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지산동고분군의 주된 무덤 형식은 구덩식돌방무덤〔竪穴式石室墳〕입니다. 이 고분군의 무덤들 가운데 3기만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입니다. 이들 고분군에서는 '고령식', '대가야식'으로 불리는 여러 종류의 토기류와 철제의 이기(利器), 마구류, 고령의 독자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금동제 관장식, 금은장신구, 옥류, 청동제 거울, 청동합(靑銅盒) 등 최고급의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여지는 등잔도 출토되어 대가야가 이들 국가와 대외교류를 활발히 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의 기록으로 이 고분군은 대체로 5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조성된 것으로 보입니다.
지산동고분군 출토유물 가운데 가장 주목을 받은 것은 32호 분에서 출토된 금동관입니다. 이관은 관대의 앞면에 반월모양의 장식물을 세워 두었는데, 그 세움장식에는 꽃가지 모양의 장식이 좌우로 각각 하나씩 달려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후꾸이현 니혼마쯔야마 고분에서 이 32호분 출토 금동관과 같은 계보를 가진 것으로 생각되는 금동관이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요컨대 대가야와 일본에서 출토된 비슷한 유형의 금동관들은 5세기 무렵에 두 나라가 밀접하게 교류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아주 귀중한 유물인 것입니다.

■  지산동 44호분은?

지산동 44호분은 주산이 경사져 내리는 끝 부분의 비교적 넓고 평평한 땅에 걸쳐 있어 다른 고분들보다 더욱 우뚝 솟아 보이는 곳에 있습니다. 고분의 아래쪽은 급경사여서 밑이 훤히 내려다보이고, 위쪽으로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있고 완만하게 경사가 져 있습니다. 45호분과 바로 연결되어 있는 지점입니다.
이 고분은 가운데에 으뜸돌방〔主石室〕1기와 딸린돌방〔副葬石室〕2기의 큰 돌방〔石室〕을 만들고, 주위에 작은 돌덧널〔石槨〕32기를 부채살 모양으로 배치한 다음 타원형 둘레돌〔護石〕로 이들 모두를 둘러싼 다곽분(多槨墳)입니다. 순장자는 32기의 작은 돌덧널에 순장되어 있고, 그 외에 으뜸돌방과 딸린 돌방에도 1명 이상씩 묻혀있어 적어도 36명 이상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도굴로 인해 매장 당시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뚜껑접시, 그릇받침 등의 토기류는 많이 남아 있습니다. 특히 딸린돌방인 남쪽 돌방에는 대형그릇받침 18개가 집중적으로 나왔습니다. 이밖에 투구를 비롯한 철제무기류, 말띠드리개, 금제귀걸이, 청동그릇과 다양한 종류의 옥 제품들이 출토되었습니다. 또한 백제나 중국계의 것으로 보이는 등잔 한 점과 일본 오키나와제도에서만 생산되는 야광조개로 만든 국자 조각도 나왔습니다. 이 유물들은 대가야가 여러 나라와 활발하게 교류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출토된 유물과 문헌기록으로 볼 때 이 고분은 5세기 중, 후반 경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  지산동 45호분은?

45호분은 주산이 급경사를 이루며 내려 뻗기 시작하는 돌출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44호분에서 산 위로 100m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이 고분은 가운데에 두 개의 큰 돌방을 동북-서남 방향으로 나란히 설치하고 그 외곽에 11개의 돌덧널을 부채꼴 모양으로 배치한 다곽식 무덤입니다. 돌덧널 외곽에는 둘레돌을 둘렀습니다. 으뜸돌방은 암반을 깊게 파고 네 벽을 큼직한 깬돌〔割石〕로 고르게 쌓았는데, 길이와 너비의 비가 4.5 : 1인 좁고 긴 구덩식돌방입니다. 이런 모양의 돌방은 고령지방에서 보편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가야양식의 무덤'이라고도 합니다.
45호분의 규모는 긴 지름이 28.2m, 짧은 지름이 25.7m, 뚜껑돌〔蓋石〕위에서의 높이가 2.8m입니다. 도굴당했기 때문에 껴묻거리의 상당수가 없어졌는데, 그래도 남아있는 유물이 꽤 있었습니다. 굽다리접시 등의 각종 토기류를 비롯하여 금동관식(金銅冠飾), 금제귀걸이, 말안장, 재갈, 말띠꾸미개, 은으로 장식된 고리손잡이큰칼의 손잡이부분, 쇠창, 각종 청동제품 등이 으뜸돌방에서 나왔습니다.
이 무덤도 역시 순장묘로, 11기의 돌덧널 외에 으뜸돌방에 2명 이상, 딸린돌방에 1명 이상의 순장자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들도 금귀걸이와 목걸이를 걸고 있어서 신분이 낮은 사람들을 순장했으리라고 보는 일반적인 견해에 의문을 품게 했습니다. 이 무덤은 대략 5세기 중, 후반경에 만들어졌으리라고 보고 있습니다.

지산동 45호분 금동관식(金銅冠飾)


■  지산동 32호분은?

32호분은 큰 무덤들이 자리하는 주산의 주능선이 급경사로 내려와 넓고 평평한 형상을 이루는 구릉 정상부에 위치해 있습니다. 32∼35호분으로 이름 붙여진 4기의 고분이 300여 평의 면적 안에 서로 2∼3m 간격을 두고 모여 있습니다.
이 고분은 묘역 가운데에 돌방 1기와 돌덧널 1기를 나란히 배치한 다곽분으로, 주위에 길이 11.2m의 타원형으로 둘레돌을 돌려 놓았습니다. 봉토는 긴지름이 13.1m, 짧은지름이 12.6m, 높이는 뚜껑돌 윗면에서부터 1.5m입니다. 돌방은 두껍고 납작한 직사각형의 깬돌로 네 벽을 엇물리게 쌓았으며, 넓고 편평한 깬돌 10매로 뚜껑돌을 덮었습니다.
32호분에서는 뚜껑긴목항아리, 뚜껑굽다리접시, 바리형그릇받침, 큰 합 안에 작은 합들이 들어있는 모자합(母子盒) 등의 토기류와 갑옷과 투구, 고리손잡이큰칼, 발걸이, 청동방울 등이 출토되었습니다. 특히 나뭇가지모양의 세움장식을 한 금동관이 출토되어 주목을 받았습니다.
이 고분의 주인공은 돌방 가운데에 안치된 나무곽 속에 동북방향으로 눕혀 있었으며, 껴묻거리의 성격으로 보아 남성으로 생각됩니다. 주인공의 발치쪽 껴묻거리 속에는 또 한사람의 피장자가 있었는데 아마도 순장된 사람일 것입니다. 순장자는 돌방에 1명, 순장 돌덧널에 1명으로 총 2명이 확인되었습니다. 이 고분은 5세기 중반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대가야 박물관 - Museum of Daegaya 

이상 포스팅은 일반인의 상식으로 공부하며 온라인에서 자료를 모아 편집한것이며 학술적인 신뢰도가 없음으로 인용하지 말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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